<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1930 >

Time and tide wait for no man.

by 마음돌봄

아무도 기다리지 않지만 나만의 약속과 계획으로 시작된 영국 책 이야기

한동안 아무 글도 쓸 수 없었다.


일단, 첫 번째 요인은 영국 관련 영화 보기에 나름 실패(?)했기 때문이다.

<헨리 5세> 영화를 보고 싶었으나 넷플릭스에만 있는 영화라 아직 보지 않았다.

동영상 서비스 사이트엔 영화 관련 영상이 아주 많으나 요약본이나 타인의 해석에 기대어 글을 쓸 수는 없는 노릇.


두 번째 요인은 이 일이 단순히 책 독후감이나 영화 감상이 아니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 관련 콘텐츠는 그 사건의 배경, 당시 상황까지 알아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러 각도로 해석되는 등장인물과 작품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으리라.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나 혼자 시작한 일일지라도 점점 나름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깊어지는 시선은 피할 수가 없다. 넷플릭스에 가입을 해서라고 <헨리 5세>를 봐야겠다는 결심이 서면서도 디즈니 플러스도 열심히 못 보는 마당에 넷플릭스까지 이러다 온갖 OTT는 다 가입할 판이니 잠시 소비를 멈춰보기로 했다.

'로렌스 올리비에' 나 '캐네스 브래너' 주연의 <헨리 5세>도 있지만 기어이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헨리 5세>를 보겠노라고 버티는 나의 이상과 고집도 한몫한다고 보겠다.


이번 글은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1930 >에 관한 책이니 그동안 연재를 하지 않았던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변명은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2023년 지인 작가님께 선물로 받은 책이다.

내돈내산 하려던 나를 극구 말리던 그녀의 속사정은 나를 만나러 올 때 캐리어에 이 책을 담아 오는 것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였지만 책과 이야기로 연대한 우리(마음 돌봄 포함 11인의 브런치 작가들)는 서로의 기호와 성향, 그리고 자신만의 배려로 만나왔고 선물을 나누어 왔다.

영국을 동경하는 나에게 그녀의 찬란한 계획은 제대로 통했고, 이 책을 몇 개월에 걸쳐 읽었다.


표지와 글씨체 책의 촉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이 딱 나의 취향이었다.

간간이 터지는 작중 주인공의 문체와 글을 옆은 웃음이나 빵 터지는 모먼트를 겸비하고 있다.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놀랍도록 일치하는 감정의 공감대가 마치 나의 전생을 보는 것 같았다.


문학 모임에 있으며 간간히 '시간과 조수'라는 잡지에 글을 공모하는 그녀는 공동 수상이라 할지라도 상을 받기도 하였으며 부유하지 않은 가정 살림이지만 요리사와 정원사 그리고 유모도 있다. 언제든지 그만두려 으름장을 놓는 요리사의 비위도 맞춰야 하고, '키이츠'와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는 그녀는 남 앞에서 책을 잘 아는 체를 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실제로 책도 좋아하는 것 같고.


넉넉지 않은 경제 사정에 중요 행사나 있어야 새 드레스를 맞출 수 있는데 이마저도 간당간당한 실정이다.

전당포에 여러 번 물건을 저당 잡으며 생활을 이끌어나가는데 자신이 처한 형편에서 최선을 다한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 남편 로버트와의 뜨겁진 않지만 신뢰감 있는 결혼 생활. 그 와중에 '레이디 복스'를 뒤에서 말하는 그녀는 전혀 밉지 않고 오히려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지극히 일치한다.







p. 11
엄마들과 함께 호텔 라운지에 둘러앉는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식 흉을 보고 남의 자식 칭찬을 하느라 바쁘다.


p. 27
우유 대금을 다음 달로 미루고 세탁비도 전액 결제하는 대신 일부를 달아 놓는다. 그러면 프리피 앤드 콜먼 상사에 12월 1일 날짜가 적힌 수표를 보낼 수 있다. 재정적 불안정은 정말 괴롭다



p. 35
인간의 운명은 어째서 이토록 불공평한지 모르겠다. 그래서 환생을 믿고 싶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한참 상상해 본다. 모든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낫고 레이디 복스와 나의 입장이 뒤바뀐다면 어떨까?



p. 61
알고 보니 이 신사는 레이디 복스를 만난 적이 있다. 얘기가 나오자 그는 레이디 복스가 몸 쓸 여자인 것 같다고 덧붙인다. 어찌나 말이 잘 통하던지. 인간의 본성에서 공통의 증오는 가장 끈끈한 유대를 형성해 주는 토대가 아닐까? 대단히 찜찜하지만 확실히 그런 것 같다.



p. 206
길고 긴 휴가를 다녀오면 현실에 다시 적응하기가 너무도 어렵다.



p. 212 자주 깨닫듯 남자들은 삶의 소소한 문제에 절대 공감해 줘선 안 된다는 이상한 규칙을 갖고 있는 것 같다.



p. 216 왜 직업이 없는 여성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한가하다"라고 자주 묘사가 되는 걸까?



p. 240
엄마들은 늘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속상하지만 미키는 외모로나 매력으로나 예절로나 분명히 로빈과 비키보다 월등하다.







지방 유지이자 아마도 남편의 직장의 보스로 추정되는 '레이디 복스' 에게 소소한 복수를 꿈꾸는 모습도 귀엽고 위트 있다. 주변에 하나씩은 있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배려를 하는 사람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왜 그런 사람 하나씩은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녀가 먼저 진정한 복수무혈 전을 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2편인 <영국 여인 런던에 가다>를 보면 작가 데뷔를 하고 금전적으로 나아진다고 하니 2편을 이어서 읽어봐야겠다.


'레이디 복스' 주최의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온 날 밤 남편 로버트는 자지 않고 뭘 하냐고 묻는다.

그녀는 일기를 쓴다고 대꾸한다. 남편은 일기를 쓰는 건 시간 낭비라 생각한다 말하며 잠자리에 든다.

잠자리에 들려던 그녀도 문득 궁금해져서 묻는다.



정말 그럴까? 일기 쓰는 일은 시간 낭비일까?



후대로써 답한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으니 일기를 쓰는 건 정말 최고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당신의 후대가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


일기냐 에세이냐를 두고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나의 일기가 후대에 이렇게 위트 있고 웃음을 줄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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