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마음은 무엇일까
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어릴 적의 나는 강아지라는 생명체에 집착했다.
무작정 강아지와 같이 살고 싶다며 엉엉 울다가, 어머니로부터 강아지 인형을 선물 받았다.
바싹 익힌 메밀전병 같은 색의 푸들 인형이었다.
이름은 복실이라 지어 주었고, 일어나서 자기 전까지 거의 하루 종일 끌어안고 지냈다.
그전에는 아버지가 삐약거리며 울던 움직이는 강아지 장난감을 선물해 주셨다.
그 친구의 이름은 아마 뽀삐였던 것 같다. 털도 많이 엉키고, 금방 고장 나서 그냥 몇 번 쓰다듬다가 버렸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평생 원하던 강아지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흔한 믹스견이었고, 목 주변에는 끈끈이가 잔뜩 붙어 안고 있기 불편했다.
10살 무렵 나는 그 반짝이는 겁먹은 눈동자에 반했다.
이름은 용감한 아기 사자가 나오는 애니메이션 주인공 이름인 심바로 선택했다.
시골로 잠시 보냈던 심바는 쥐약을 먹고 죽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초등학생은 침대에 누워 밤마다 울었다. 3일 내내 밤만 되면 울었다.
그냥 너무 미안했다. 열두 살의 나는 심바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성격이 바뀐 건지, 세상에 불만이 많아진 건지 원래도 내향적이었던 성격이 더 소극적으로 변했다.
이해가 안 되는 부조리함이 싫었고, 아무도 지키지 않는 법이 싫었다.
겨우 하나 달려 있는 입으로 오백 가지 거짓말을 하는 인간이 제일 싫었다. 그러는 나도 인간인지라 자기혐오까지 심했다.
초등학생 때도 고양이는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아지보다 더 좋아했다. 심지어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가 되고 싶어서 고양이 흉내까지 낼 정도였으니까. (보통 초등학생들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많이 하곤 한다...)
20살 이후부터는 혼자서도 고양이 카페에 곧잘 다녔고, 걸을 때마저 조용한 아이들에게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다.
우울증이 심해 생각이 많아질 때는 혼자 책을 많이 읽었다.
친구도 만나지 않고 한 달 넘게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혼자 고양이 카페에 갔다.
고양이들은 내가 옆에 있어도 안 보인다는 듯이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잠을 자거나 돌아다녔다.
그때의 나는 내가 죽어도 아무도 날 기억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재수 없는 태도가 참 좋았다.
지금은 다행히 우울증은 나와 조금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귀찮음을 이겨내며 정신과에 가 상담을 받고, 시답잖은 위로를 받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강한 약을 먹으면서도 낫지 않던 우울증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나아졌다.
오히려 고양이에 대한 집착이 심해져 고양이병(?) 같은 게 생긴 기분이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퇴근하고, 계단 하나 내려가기 힘들 정도로 지쳤던 날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워 한 시간 동안 가만히 천장만 바라봤다.
그러다 목이 칼칼해진다. 흐르는 코피를 막을 힘도 없어서 그냥 삼키면서 누워 있었다.
쿠모가 몸을 붙이고 누우면 옆구리가 따뜻해지고, 치코가 머리를 비비면 알레르기로 얼굴이 간지럽다.
이대로 코피가 안 멈추고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삼십 분 정도 울었다.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그냥 이게 사랑인 것 같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쩌면 설렘을 느끼는 것이 아닌,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라는 생텍쥐페리의 구절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양이의 포근함이 좋다.
그들이 날리는 털만큼 큰, 날 바라보는 그 사랑한다는 눈빛을 좋아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만 바라보고 있는 두 개의 커다란 눈망울을 나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