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무뎌질 때까지
세상의 모든 날은 무뎌진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끼는 칼은 금방 무뎌지고, 도무지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과 보냈던 날들도 결국 잔상으로만 흐릿하게 남아 겨우 기억해 낸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나는 직장 생활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그런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야만 하는 공기를 맡겠다고 들어간 건 나다.
그 공간에서 나만 지우개로 살짝 지운 것처럼 지내고 싶은데 내 존재를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이라는 건 아무래도 너무한 부분이 참 많다.
그럼에도 나는 직장에서 항상 점심을 거르고, 옥상이나 카페에서 혼자 있는 모습만 목격되는 야생의 히키코모리 느낌으로 다니고 있다. 왠지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 있기만 해도 빌려온 고양이가 돼서, 이렇게라도 사람 행세를 하고 싶어진다.
무슨 전염병이 돌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곳에서 어떻게든 잘 살아남고 있다.
이직할 때마다 회사 사람들에게 듣는 소리가 있는데, 나에게 종종 고양이 같다는 소리를 한다.
우리 집 고양이들과 나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인간을 무서워하고 경멸한다는 점뿐인데, 그런 것들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스스로 술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술 생각만 하면서 산다.
맨 정신으로 살기 힘든 건지, 싫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세상에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아무래도 자기 객관화가 안 된 모양이다) 실컷 불평을 늘어놓다가 술에 거하게 취해버렸다.
그리고 최근 연락하기 시작한 친구에게 잔뜩 실수를 했다.
이를 테면 전화해서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는다거나, 그 친구가 잡아 준 택시에서 토를 하고, 그 비용을 낼 정신도 없이 친구 집으로 올라가 거기서도 또 토하고.
무슨 정신으로 잠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보송보송한 몸으로 일어났다. (심지어 출근길이 조금 상쾌하기까지 했다...) 그 친구는 내가 저지른 만행을 수습하느라 새벽 다섯 시에 잠들었다고 한다.
다음날 민망한 표정으로 하루 종일 사과만 하던 나에게 그 친구는 제대로 된 화 한번 안 냈다.
어느 정도 씹어서 적당히 단단하지만, 날카롭지는 않은 후라보노껌 같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모습은 오히려 날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이 친구와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고 싶게 만들어서, 더 이상 연애 같은 건 하기 싫다고 했던 날 노력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본인은 이게 계기인 줄 모르겠지만)
언젠가 나는 사람을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계속해서 사람을 찾게 된다고 한 적이 있다.
가끔 마주치게 되는 이런 사람들이 날 무너지게 한다. 다시 일어나고 싶을 때 손잡아 주지 않을지라도.
아무래도 난 고고한 척 혼자 살 위인은 안 되나 보다.
각지지 않은 사람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