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번째 공백
4월을 한참 지났는데도 소나기가 멈출 줄을 모른다. 소나기 내리는 세상에라도 갇혀버린 모양이다.
스스로를 다독이고 의지를 다잡으려는 사이에 아주 작은 틈이라도 생겨버리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당신의 존재감이 우산을 뚫고 쏟아지는 억센 빗줄기마냥 퍼부어온다.
당신이 없어도 이제는 잘 해내 왔고, 잘 해낼 수 있었는데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견고히 쌓아온 것을 제 몫의 꽃도 피우지 못한 푸른 살처럼 꺾어버리는지.
당신이 살아있었다고 내 삶이 무조건 행복해졌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없는 내가 반평생 느껴온 비참할 정도로 끈질긴 외로움은 느끼지 못했을 거다. 그건 나를 아프게도 했다가 나를 또래보다도 한참 성장시켜주었다가, 또 한참, 어리게 만들었다.
스스로 견디지 않아도 되었을 적에는 꼭 혼자 입 다물고 조용히 참게 만들었고,
스스로 해결해야 할 적이 되어서는 탓하기도 어려운 당신의 품으로 도망치고 싶게 한다.
당신이 없는 세계라는 루프 속에 갇혀서 한평생 같은 말과 마음만 반복하게 될 것 같다. 깨고 나가고 싶다가도, 그냥 그대로 영영 갇혀버리고 싶다. 깨야하는 순간에, 차라리 깨진 세상과 함께 날아가고 싶다. 이기적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좀 그러고 싶어. 그래도 이러면 또 조금은 숨이 트이는 것 같거든. 그래서, 숨을 쉬고 앙상한 가지라도 꽉 붙들어서 나는 결국 이 세상에 엷은 꽃이라도 피워야 하거든.
그저 당신에게 기대어본 적이 너무 아득해서
차가운 소나기만 퍼부어대는 당신의 빈자리에라도 기대고 싶었어, 계속.
미안해. 아빠에게 딸은 가끔은 그런 존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