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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티잔,
자유로운 여성인가? 희생자인가?

《셰리》 by 콜레트

by 프렌치 북스토어

프랑스 문학과 역사 속에서 눈여겨봐야 할 흥미로운 문화 중에 코르티잔(courtisane)이라는 존재가 있다. 코르티잔은 주로 귀족이나 왕족, 부르주아 같은 상류층을 상대하는 매춘부이자 이들의 정부를 의미한다. 그녀들은 남성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비교적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는 했다.


이러한 코르티잔은 단순한 고급 매춘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의 사회적·문화적 풍경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은 단순히 남성의 유흥을 위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 사교계를 주도하고 예술과 문학,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콜레트(Colette)의 소설 《셰리(Chéri)》 속 주인공 레아(Lea)는 이러한 코르티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에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과 사랑의 개념을 뒤흔드는 독특한 캐릭터로 평가되기도 한다.


코르티잔은 단순한 고급 매춘부 정도로 규정지을 수 없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다. 이들은 귀족과 부르주아 남성들의 후원을 받으며 경제적 독립을 유지했고, 그들과 동등한 수준의 문화적 소양과 지적 교양을 갖춘 경우가 많았다. 살롱 문화의 중심에 서서 예술가, 정치인,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당대의 트렌드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코르티잔은 단순한 성적 대상이 아니라,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주체성이 부각되는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남성 권력에 의존해야만 했고, 나이가 들수록 사교계에서 밀려나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특히 소설 속 레아는 젊고 아름다운 애인 셰리(Chéri)와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현실과 마주한다. 그녀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시대적·사회적 구조의 벽을 넘어설 수 없는 숙명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콜레트의 《셰리》, 프랑스어




줄거리 요약


소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 레아와 셰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레아는 한때 파리 사교계에서 명성을 떨쳤던 코르티잔이었다. 그녀는 은퇴 후에도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는 중이다. 레아에게는 젊고 아름다운 셰리라는 애인이 있는데, 소설은 이 둘의 대화로 시작한다.


어느 날 셰리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털어놓는다. 하지만 셰리의 결혼 소식에도 레아는 무덤덤하기만 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녀의 반응에서 이 둘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단지 캐주얼한(?) 관계, 딱 그 정도 관계였지만 이 둘은 벌써 6년째 함께이다. 이제 레아는 마흔아홉, 셰리는 스물다섯이 된 지금 이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셰리가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린 뒤로 레아는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 하지만 셰리는 그녀의 이러한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셰리 또한 결혼 후 심각한 우울감에 시달린다. 그렇다. 셰리는 결혼을 했음에도 레아를 그리워하는 중이다.


레아는 6개월 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녀는 떠나 있는 동안 몇몇 애인과 시간을 보냈지만, 파리로 돌아온 후로 예전 관계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보인다. 레아도 마침내 자신의 마음이 셰리를 향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저 가볍게만 여기던 셰리와의 관계에서 마침내 무게를 느끼게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셰리 또한 레아를 다시 찾아오게 된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레아를 마주한 셰리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두 사람은 마침내 자신들의 관계가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그날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셰리는 날이 밝아오는 햇살에 눈을 뜨게 된다. 햇살에 비친 레아의 모습과 마주하는 순간, 셰리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 셰리의 눈앞에 있는 레아는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다. 레아는 눈에 띄게 나이가 들어 있었고, 시간이 다 해 저물기 시작한 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셰리는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레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을 돌봐줄 레아의 어깨는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그는 침대를 나와 옷을 입기 시작한다. 레아가 눈을 떴을 때, 셰리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아 또한 떠다는 셰리를 잡지 않는다. 레아는 셰리를 아내에게로 돌려보낸다. 셰리가 떠나고, 레아는 그녀의 방에 홀로 남겨진 모습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Pierre_Auguste_Renoir_-_Country_Dance_-_Google_Art_Project.jpg "시골에서 무도회(Danse à la campagne)"의 일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883년




코르티잔, 어원과 의미


코르티잔이라는 용어는 이탈리아어 ‘cortigiana’에서 유래했다. 본래 궁정(court)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을 의미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양 있고 세련된 여성들이 귀족이나 왕족과 관계를 맺으며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이 점차 독립적인 신분을 형성하면서 프랑스에서도 ‘courtisane’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코르티잔은 단순한 궁정 여성에서 고급 창녀를 의미하는 단어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매춘부와는 달리, 이들은 재력 있는 후원자와의 관계를 통해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며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코르티잔이 사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술가와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이자 스스로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여성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리안 드 푸지(Liane de Pougy)", 벨 에포크 시대 유명 코르티잔, 1891년에서 1892년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에서의 코르티잔 문화


19세기말과 20세기 초 프랑스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 불리는 문화적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는 산업 혁명과 경제 성장으로 인해 부유층이 증가했으며, 도시 생활이 활기를 띠면서 사교 문화가 발달했다. 코르티잔들은 이러한 사교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지성과 매력을 갖춘 여성으로서 귀족 및 부르주아 계층과 교류했기 때문이다.


특히 파리는 이 시기 코르티잔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녀들은 고급 살롱을 운영하며 문학가, 예술가, 정치인들을 초대해 문화적 교류를 주도했다. 대표적인 코르티잔으로는 라 파이바(La Païva), 발테시아(Valtesse de La Bigne), 그리고 리안 드 푸지(Liane de Pougy) 등이 있으며, 이들은 단순한 애인 이상의 역할을 하며 사교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럼에도 코르티잔의 삶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재력과 미모가 있을 때는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후원자를 잃거나 사교계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 소설의 주인공 레아 역시 이러한 현실과 직면하며, 사랑과 독립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이유이다.




영화 『셰리』 속 레아, 2009년




소설 속 레아,

연인이자 후원자이자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인물


소설 속 레아는 코르티잔으로서 귀족과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독립한 인물처럼 그려진다. 한때 사랑했던 남성들의 후원을 받았지만, 그 관계를 철저히 관리하는 주체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전통적인 여성상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녀는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후원자이자 삶의 결정권을 가진 인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레아와 셰리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요소가 두드러진다. 셰리는 귀족 가문의 젊은 남성이지만, 경제적·심리적으로 레아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레아는 젊고 아름다운 셰리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냉철하게 통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특성은 코르티잔이라는 위치가 단순히 남성의 후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후원자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ill_1175698_cheri-bis.jpg 영화 『셰리』 속 레아와 셰리, 2009년




이러한 레아의 독립적이면서 주체적인 행동은 사랑에서 버림받은 비극적 인물로 남겨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삶을 통해 코르티잔이라는 존재가 가진 이중성을 강조한다. 코르티잔은 사회적으로 경멸받는 신분이지만, 동시에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경제적 독립을 이룬 몇 안 되는 여성들이기도 했다. 작품 속 레아는 이러한 코르티잔의 삶을 대표하는 동시에, 그녀만의 고유한 감정적 서사를 지니기도 한다.


레아는 나이가 들며 사교계에서 밀려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려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별을 선택하는 자세, 이러한 선택은 당시 프랑스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했던 역할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콜레트가 전통적인 여성상에 균열을 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cheri_.jpg 영화 『셰리』 속 레아와 셰리, 2009년




여성 주체성 vs 남성 권력


소설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코르티잔의 삶을 통해 프랑스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경제적·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아는 단순한 애인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여성으로 그녀의 존재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자립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셰리와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한계점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셰리는 전통적인 귀족 남성으로서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속해 있지만, 정작 레아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관계의 불균형은 코르티잔과 귀족 남성 간의 관계가 단순한 경제적 후원-피후원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복잡한 심리적·사회적 역학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소설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제약이 교차하는 지점을 조명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특히, 레아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단순히 남성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 이상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독립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셰리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분석하고 통제하려 든다. 이후에는 셰리와의 사랑이 단순한 감정적 유대만이 아닌, 상호의존적인 관계였음을 깨닫게 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권력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172578463_479091406869683_2022204327344383807_n.jpg 발테시아 드 라 비뉴(Valtesse de La Bigne)




벨 에포크, 부르주아,

그리고 살롱


코르티잔 문화가 번성한 배경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프랑스의 사교 문화가 있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의 파리는 세계적으로 예술과 문학, 패션, 그리고 사교활동의 중심지였으며,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이 이 문화를 주도했다.


코르티잔들은 당시 상류층 남성들과 동등한 수준의 문화적 교양과 세련미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화려한 살롱을 운영하면서 예술가, 문인, 정치인, 금융업자들과 교류하며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살롱은 단순한 유흥의 공간 이상의 기능을 했다. 대부분 철학과 문학, 음악과 예술이 논의되는 문화적 장으로 활용되었다. 일부 코르티잔들은 이러한 살롱을 통해 예술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유명한 문인들이 이들에게 영감을 얻어 작품을 창작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코르티잔 중 한 명인 발테시아 드 라 비뉴(Valtesse de La Bigne)는 단순한 후원자의 역할을 넘어 스스로 예술과 패션의 트렌드를 이끌었으며,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와 같은 화가들에게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리안 드 푸지(Liane de Pougy), 라 파이바(La Païva)와 같은 코르티잔들도 당대 파리 사교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Gervex_-_Le_bal_-_P2706_-_Musée_Carnavalet.jpg "무도회(Le Bal)", 앙리 제르벡스, 1890년, 카르나발레 박물관




'이용당하는 자'와 '이용하는 자'


당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허용된 직업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부르주아 계층의 여성들은 교육을 받긴 했지만, 경제활동을 하는 대신 가정 내에서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이에 반해 코르티잔들은 결혼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 스스로 경제적 독립을 이루는 몇 안 되는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재력 있는 후원자와의 관계를 통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결혼이라는 사회적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유를 의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로 불안정한 삶을 의미하기도 했다. 후원자가 사라지거나 나이가 들면서 인기가 줄어들면, 그들의 사회적 입지는 급격히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코르티잔은 단순한 이용당하는 위치에서 전략적으로 남성 권력을 이용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은 사회적·제도적 한계 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이러한 고민은 소설 속 레아의 삶에서도 나타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레아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1200px-Chéri_-_film.jpg 영화 『셰리』 속 레아, 2009년




코르티잔들은 자신들의 삶을 하나의 사업처럼 운영해야 했다. 그들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후원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어야 했고, 이를 위해 지적 교양과 사교 기술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레아 역시 젊고 아름다운 시절, 뛰어난 감각과 세련된 태도로 사교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삶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본 코르티잔의 삶과 전략


특히, 그녀와 셰리의 관계는 사랑과 경제적 의존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보여준다. 셰리는 젊고 매력적인 귀족 출신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레아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레아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연애 감정을 넘어서,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현실적 선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또한, 레아와 셰리의 관계는 전통적인 연애 서사의 남녀 역할을 뒤흔든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이 연상이고 여성이 연하인 관계가 더 흔했지만, 소설에서는 반대로 나이 든 여성이 젊은 남성을 후원하는 관계로 보인다. 이렇게 역전된 관계는 단순한 나이 차이를 넘어, 여성과 남성의 권력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레아는 연애 감정 속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와의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불안은 단순한 비극적 사랑이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젊음을 향한 사회적 강박을 반영하는 요소로도 볼 수 있다.


셰리 역시 단순히 철없는 젊은 애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코르티잔이라는 존재를 향한 사회적 편견과 개인적인 욕망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동시에, 레아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갈등을 경험한다. 젊음과 노화, 남성과 여성, 사랑과 현실이라는 복잡한 문제들을 교차시키면서 자품의 서사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862209066.0.x.jpg 콜레트의 《셰리》, 프랑스어




엄마 같은 연인?

연상연하 구도와 심리적 의존


레아와 셰리의 관계는 단순한 연애 이상으로 복잡한 심리적 역학이 작용하는 관계이다. 전통적인 연애 서사에서 남성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소설에서는 정반대의 구조가 나타난다. 레아는 경험과 경제력을 갖춘 나이 든 여성이며, 셰리는 젊고 아름답지만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인물이다.


레아는 셰리를 연인으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보호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 그녀는 그의 교육과 생활을 보살피며, 그가 귀족 사회에서 적절히 기능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애정과 모성애, 권력과 의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둘 사이의 감정은 단순한 연애 감정 이상으로 전개된다.


셰리는 어머니 같은 존재인 레아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떠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그의 성장 과정에서 레아는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일종의 심리적 지주 역할을 하지만, 레아가 결혼이라는 전통적인 사회적 틀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큰 갈등과 마주하게 된다.




작품 속 일러스트, 로벨리치, 1925년




물질적·정서적 교환의 이면


코르티잔과 후원자(또는 연인)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금전적 거래를 넘어서는 복잡한 감정적·사회적 교환의 형태를 띤다. 레아와 셰리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교환의 구조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레아는 셰리에게 경제적 안정과 보호, 심리적 지지를 제공하지만, 반대로 셰리는 젊음과 순수함,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적 요소를 레아에게 제공한다.


이러한 교환적 관계는 단순한 연애 관계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 간의 권력관계, 나이와 젊음, 경제력과 감정의 상호 교환이라는 복합적인 역학을 보여준다. 셰리는 귀족 가문의 후계자로서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경제적·정서적으로 레아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는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를 전복하는 형태를 띤다.


하지만 이러한 교환 관계는 필연적으로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다. 셰리는 결국 사회적 기대에 의해 젊은 귀족 여성과 결혼해야 했기에 레아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끝이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레아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지만, 동시에 셰리를 잃는 것이 단순한 감정적 상실을 넘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는 점을 자각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신분과 경제적 교환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두 인물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고 비극적으로 만든다.




download (3).png 작품 속 일러스트, 로벨리치, 1925년




사랑과 소유, 자유와 속박 사이


레아와 셰리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사랑과 소유의 문제이다. 레아는 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그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코르티잔으로서 그녀는 남성과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다루는 데 익숙하지만, 셰리와의 관계에서는 감정을 통제하기가 어렵다. 이는 그녀가 단순한 코르티잔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갈등을 경험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셰리 역시 레아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구속당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젊음과 자유를 갈망하며,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이는 결국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레아는 셰리를 소유할 수 없으며, 셰리 또한 레아의 품 안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관계는 애초부터 운명적으로 비극을 향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다.


코르티잔이라는 위치는 기본적으로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전략적으로 생존하는 방식을 요구하지만, 레아는 셰리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전략적 계산을 넘어서는 감정을 경험한다. 그러나 결국 현실은 그녀가 감정보다 이성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강요하며, 이는 그녀의 내적 갈등을 극대화한다.




2018_9_RV_76465-30.jpg "파리의 여성 노동자", 1915년, 파리




전쟁 전후 코르티잔


소설이 출간된 1920년은 1차 세계대전 직후로, 프랑스 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쟁 전까지 코르티잔들은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의 남성들을 후원자로 삼아 경제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귀족과 상류층 남성 인구가 급감하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후원 구조도 흔들리게 된다.


더욱이 1차 세계대전 동안 여성들은 기존의 전통적 역할에서 벗어나 공장 노동, 의료 활동, 행정 업무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위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코르티잔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전쟁 후에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교계에서 입지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전쟁 이후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경제적 역할이 확대되었고, 이는 코르티잔 문화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기존의 코르티잔들은 전쟁 전의 화려한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고, 일부는 스스로 사업을 시작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레아 같은 인물들은 시대의 흐름에 적응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통적인 코르티잔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투표하는 여성들", 1935년




페미니즘과

코르티잔의 쇠퇴


전쟁 후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역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코르티잔이 경제적 독립을 이루는 몇 안 되는 여성상이었던 전쟁 전과 달리, 전후에는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산층 여성들은 교육을 받고 사무직이나 교직에 종사하며, 결혼 외에도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코르티잔이라는 존재의 필요성을 점점 약화시켰다. 전통적으로 코르티잔들은 사회적·경제적 독립을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남성과의 관계를 구축해야 했지만, 이제 여성들은 보다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으로 경제적 자립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페미니즘 운동도 점점 더 활발해졌다. 여성의 권리와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프랑스 사회는 여전히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이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용인된 직업과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고, 코르티잔과 같은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독립을 유지했던 여성들은 점점 더 주변으로 밀려났다.




image_processing20190724-6176-10zufde.jpg "휴전 기념일. 파리, 1918년 11월 11일", 가스파르 마욜




레아 이후 코르티잔


코르티잔 문화가 사라진 이후에도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위치는 여전히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상품화 현상도 지속되었다. 영화, 패션, 광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여성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대중문화 속에서 소비되는 존재가 되었다.


이전 시대의 코르티잔들이 사교계에서 명성과 영향력을 쌓으며 경제적 독립을 유지했다면, 전후에는 여성들이 모델, 배우, 가수 등으로 대중 매체에 등장하면서 또 다른 형태의 경제적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 구조 안에서 이루어졌고, 여성의 독립이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아는 전통적인 코르티잔 문화의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코르티잔으로 새로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점점 더 소외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경제적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해 왔지만, 결국 시대의 변화 앞에서는 그마저도 무력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갈등을 상징한다.




콜레트의 《셰리》, 프랑스어




코르티잔을 바라보는 이중적 프레임

: 존경 vs 멸시


프랑스 사회에서 코르티잔은 언제나 이중적인 시선을 받아왔다.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와 귀족 사회에서 예술과 문화를 이끄는 세련된 여성으로 존경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멸시당하기도 했다.


레아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사교계에서 밀려나는 운명을 맞이한다. 젊고 아름다울 때는 그녀를 둘러싼 찬사가 가득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사회는 그녀에게 더 이상 자리를 내어주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사회가 여성을 평가하는 방식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코르티잔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해야 했지만, 결국에는 그들도 나이와 사회적 변화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콜레트가 바라보는 이러한 현실은 단순한 비극적 서사로 끝맺지 않는다. 레아가 가진 품격과 존엄을 끝까지 유지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선택을 통해 코르티잔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시대적 한계를 돌파하려 했던 여성들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선택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여성들이 맞닥뜨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의 선택과 삶을 존중하는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COLETTE-FEMINISTE-1024x683.png 콜레트




자유로운 여성에 대한 재정의


《셰리》는 여성의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레아는 경제적으로 독립했지만, 결국 사랑 앞에서 무력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경제적 독립이 곧 완전한 자유일까? 사회적·문화적 조건이 여전히 여성의 선택을 제한한다.


콜레트는 레아를 통해 여성이 단순히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사랑과 자유, 독립과 외로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지금까지도 겪어내야 하는 현실과 연결시켜 준다. 자유로운 여성이라는 개념을 보다 확장해서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더 나아가 사회적 압박 속에서도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사랑과 권력, 경제적 독립과 감정적 의존 사이에서 여전히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분위기에서 작품은 이러한 갈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334228101_501510592182445_7236875302004812243_n.jpg 콜레트




삶조차 문학 같았던 작가,

콜레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국장이 치러지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국장은 단순한 장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라와 문화에 남긴 영향을 기리는 국가적 행사이기 때문이다. 1954년 프랑스에서 한 여성 작가의 국장이 치러졌다. 그전까지 여성 작가에게 이런 예우를 한 적이 없었던 프랑스에서, 그녀는 예외였다.


그녀의 이름이 낯설더라도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콜레트의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고도 의미가 깊은 주제이다.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며 자유롭게 살아간 무척이나 선구적이었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성의 감정과 욕망을 솔직하게 그려내고, 문학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남긴 작가였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삶은 문학적 착취와 사회적 편견과의 싸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콜레트의 초상화, 자크 움베르, 1896년




콜레트는 1873년, 생 소베르앙 퓌세라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자연을 사랑하고 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평범한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바뀐 것은 20살이 되던 해 15살이나 많은 문인 겸 출판업자인 윌리(Willy)와 결혼하면서부터였다.


윌리는 당시 파리 문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콜레트는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결혼은 단순한 사랑으로 가득하지 않았다. 콜레트가 쓴 작품들은 윌리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빼앗긴 채 그의 그늘 속에서 살아야 했다.


특히 그녀가 쓴 클로딘 시리즈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청소년들의 사랑과 성장을 다룬 이 소설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책의 표지에 적힌 이름은 콜레트가 아니라, 윌리의 이름이었다.


윌리는 아내가 계속 글을 쓰도록 강요했다. 때로는 그녀를 방에 가둬놓고 원고를 완성할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하는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녀의 재능을 갈취했다. 결국 그녀는 이러한 착취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콜레트는 이혼을 감행했고,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콜레트와 미시, 1906년




이혼 후, 콜레트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녀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바로 무대 배우였다. 그녀는 파리의 카바레와 극장에서 춤을 추고 연기를 해서 생활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공연은 단순한 무대 위의 연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공연에서 다른 여성 파트너와 키스를 나누는 등,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특히 미시(Missy)라는 별명을 가진 귀족 여성과의 연애는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미시는 남성적인 복장을 즐겼고, 콜레트와 함께 살면서 그녀의 연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공연했던 연극은 경찰의 단속을 받기도 했다.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그녀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하지만 콜레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사회적 규범을 깨뜨리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2fdecc7_1674553498235-akg-akg3683360.jpg 소설을 쓰는 콜레트, 20세기 초, 파리




여성의 사랑과 욕망을 이야기하다


무대 위의 삶을 살면서도, 콜레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들은 기존의 연애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시선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문학이 연상의 남성과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사랑을 그렸다면, 콜레트는 이를 뒤집어 연상의 여성과 젊은 남성이라는 관계를 조명했다. 특히, 사랑이 끝나가는 과정과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관계의 본질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그녀의 작품은 여성의 시선에서 여성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문학으로 평가받았다. 이후에도 여러 번 영화화될 정도로 프랑스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콜레트는 말년까지도 끊임없이 글을 썼다. 그녀는 프랑스 문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정된 첫 여성 작가였으며, 프랑스 문학계에서 그녀의 입지는 확고했다. 195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정부는 그녀를 기리는 국장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는 여성 작가로서는 최초의 일이었으고, 그녀가 프랑스 문학과 여성의 자유에 미친 영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콜레트의 삶은 문학을 넘어, 한 사람이 사회적 편견을 넘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야 했던 시대에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쓴 작가였다.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도 사랑과 욕망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며, 여성의 독립을 문학으로 그려낸 인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문학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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