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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파리의 봄

《L’Insurgé》 by Jules Vallès

by 프렌치 북스토어

어떤 도시들은 비극으로 기억된다. 대부분 과거의 오점을 또 다른 무언가로 덮어버리려 하지만, 그날의 일을 되살려 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도 어느 지역을 아픈 과거 속 무대라고 부르지 않듯, 파리도 비극의 도시라고 기억하지 않는다.


1871년 3월 18일, 파리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굳은살이 가득한 손을 무기 삼아, 거리 위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투표함에 종이를 밀어 넣으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변화를 이끈 사람들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교사, 정비공, 인쇄공, 그리고 이름 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소박했다. 모든 아이들이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원했고, 밤을 새워 빵을 만들지 않는 삶을 원했다. 누군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않기를 원했고, 안에서부터 움직일 수 있는 도시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의 봄은 길지 않았다. 베르사유에 머물고 있던 누군가의 후손들은 그들을 반란군이라고 불렀고, 군화를 신고 파리로 돌아왔다. 《반란군(L’Insurgé)》은 바로 이 도시, 파리의 가장 뜨겁고도 잔혹했던 봄을 기록하고 있는 소설이다. 영웅 서사도, 전투의 환호도 담겨있지 않은, 평범한 누군가가 쓰러져가는 과정을 포착한다.




barricade-rue-commune-de-paris-1024x709.jpg 파리 코뮌의 바리케이드




사람들은 길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길에서 주어온 돌과 분리된 가구 조각, 다리가 부러진 의자, 오래된 침대 프레임이 파리 거리 한복판으로 모여들었다. 길거리에 모인 식탁 위에는 아직 말라붙은 수프 자국이 남아 있었고, 세탁물이 널려 있던 철제 건조대는 과거 그들을 소중히 다뤄주었던 누군가를 보호해 줄 가녀린 언덕을 완성하는 마지막 구조물이 되었다.


이렇게 쌓아 올려진 바리케이드 앞에서 발레스의 시선은 언제나 낮게 깔려 있었다. 벽 너머 무너져 내리는 이들의 어깨를 올려다 보고,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이들의 굳은 발을 따라갔다. 골목길의 먼지, 진흙이 가득 묻은 찢어진 신발, 허기진 손이 움켜쥔 빵 조각, 그리고 눈높이보다 낮게 박힌 총탄 자국들에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리고 5월 21일, 파리의 문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이번엔 해방이 아니라 포위였다. 진압은 잔인했다. 바리케이드는 무너져 내렸고, 광장에는 쓰러져가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피의 주간(La Semaine Sanglante)이 시작된 것이다.


도시의 5월 마지막 주는, 총성과 화염, 그리고 침묵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가게 안에서, 누군가는 뒷골목에서, 누군가는 공동묘지의 벽 아래에서 영원히 잊혀졌다. 약 2만 명의 이름이 사라졌고, 수천 명은 삶의 터전에서 끌려나가야만 했다.




차갑도록 평범한 일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혁명이 끝난 후, 도시는 침묵했다. 봄은 지나갔고, 모든 소리는 사라졌다. 총성도, 고함도, 발자국 소리까지도 들을 수가 없었다.


오직 침묵만이 남은 도시에 사람들이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멈칫거리며 골목을 지나쳤고, 자신의 가게, 자신의 집, 자신의 자리를 확인했다. 차갑도록 평범한 일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비명이나 울음도 없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든 것들은 시간 안에 묻어 둔 채로 말이다.




Villa%20des%20otages%201900.jpg 피의 주간이 지난 악소 거리(rue Haxo), 파리 20구




기억은 행위이고, 책임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누군가의 결단이다. 비극을 기억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우리가 다시는 같은 비극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가장 인간적인 저항이다.


무수한 비극이 속에서 살아남은 파리는 결코 비극의 도시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 기억을 품고 도시에 다시 숨을 불어넣고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침묵하고 있지만, 그들은 기억은 조각상이나 연설문으로 요약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침묵 속에서 잊혀진 이들을 향한 연민과 책임 의식이라는 사실까지도.


이게 내가 아무것도 없는 그곳을 다시 찾는 이유이다.




Fleury_-_Le_Père_Lachaise_historique_-_001_bis_-_Mur_des_Fédérés.jpg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위치한 연방군의 벽(Mur des Fédérés), 파리 20구






- 악소 거리 학살(Massacre de la rue Haxo): 1871년 파리 코뮌이 막바지로 치닫던 5월 26일, 파리 20구 악소 거리(Rue Haxo) 근처에서 가톨릭 성직자를 포함한 약 50명의 인질이 코뮌 측에 의해 집단으로 처형되었던 사건. 이들은 코뮌 기간 동안 반혁명 세력 또는 베르사유 정부와의 연계를 의심받아 인질로 붙잡혀 있던 인물들로 코뮌이 정부군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코뮌 측은 절망적인 분위기와 복수심 속에 이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 연방군의 벽(Mur des Fédérés): 1871년 5월 28일, 파리 코뮌이 정부군(베르사유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던 마지막 날, 약 147명의 코뮌 방어군이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벽 앞에서 집단 처형당했다. 이 학살은 코뮌의 마지막 저항이 일어난 곳으로, 이후 피의 주간(La Semaine sanglante)의 비극적 종결을 상징하는 장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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