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증 연대기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른쪽 무릎에 있던 조그맣고 까만 점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점 커지는 하얀 점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바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부모님께서는 바로 백반증이란 걸 아셨습니다.
아빠가 백반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 사이즈의 백반증이 목에 있었고, 초등학생 손바닥만 한 크기의 얼룩덜룩한 백반증이 있었습니다. 백반증은 유전력이 있는 질환이었기에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죠.
2011~2015
부모님께서 바로 동네에서 유명한 피부과에 데려갔습니다. 처음엔 *엑시머 레이저로 무릎을 열심히 관리했었죠. 그렇지만 무릎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 엑시머 레이저: 국소부위 백반증을 치료하는 레이저
무릎 뒤 양쪽에 또 조그마한 점이 생겼습니다. 배에도 스멀스멀 흰 점이 올라왔습니다. 손도 얼룩덜룩 백반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배에 점점 꽤나 크게 자리를 잡게 되니 엑시머 레이저로는 한계가 있어 *전신 광선 치료도 병행했습니다.
* 전신 광선 치료: 옷을 탈의하고 광선이 나오는 통 안에 들어가서 일정 시간 광선에 노출되게 하는 치료
광선 치료를 받았지만 부위는 점점 넓어졌습니다. 아랫배는 백반증에 뒤덮였고 윗배와 등, 가슴 쪽에는 드문드문 그리고 얼룩덜룩 백반증이 자리 잡았습니다. 손과 눈가, 그리고 팔 접히는 부분 안쪽까지. 자극이 자주 가는 부위에 하나둘씩 백반증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피부과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 중학교 때까지는 계속 병원에 다니면서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번지는 백반증을 보고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숙사 고등학교를 들어가서 입시 준비를 하며 백반증 치료를 중단했습니다. 배를 뒤덮고, 곳곳에 생긴 백반증을 품은 채 고등학교 3년을 치열하게 보냈습니다.
2018~2019
대입이 끝나니 시간이 붕 떴습니다. 대학교를 들어가기 전 약 4개월 간의 시간 동안 다시 백반증 치료가 돌입했습니다. 백반증은 제가 열심히 다녔던 동네 피부과 때문에 더 번지게 된 건지, 원래 번질 운명이었는지 판단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번엔 좀 더 백반증에 전문적이고 저명하신 의사 선생님께 진료를 받고 싶어 대학 병원을 찾아가게 됐습니다. 대학 병원이다 보니 예약을 잡기도 힘들어서 졸린 눈을 꾸역꾸역 떠가며 병원을 꾸준히 찾아갔습니다.
다행히 대학 병원에서는 백반증이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그냥 환자인 제가 느끼기에는 똑같이 엑시머 레이저와 광선 치료를 한 거뿐인데 뭐가 다른 거지 싶긴 했지만요. 뭐가 됐든 온통 하얗게 덮인 제 배의 백반증에 모공에서부터 제 살색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백반증에 무수한 살구색 점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효과가 좋은 건 눈이었습니다. 원래 눈가는 치료가 잘되는 부위이다 보니 금세 흰점이 사라졌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 중에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이 사라지니 대학 병원을 다니면서 만족도가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외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의 치료 공백기가 생겼습니다. 꾸준히 치료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 질환인만큼 잠깐 입국하는 걸로는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외국에 살면서는 백반증을 치료하고 싶다는 생각도 크게 가지지 못했습니다.
2024~
졸업을 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서 다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성인이 되고는 더 이상 백반증이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고 그대로여서 백반증이 이제 끝났나 보다 싶었는데 제모가 화근이었습니다.
겨드랑이를 수시로 제모하다 보니 겨드랑이에 조그마한 흰 반점이 올라왔습니다. 그렇다고 제모를 안 할 수는 없으니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제모를 계속했습니다. 결국 겨드랑이 양쪽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백반증이 생겼습니다. 이것도 사실 생기면서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었습니다.
겨드랑이에 새로 생긴 백반증과 더불어 눈가에 있던 백반증이 점점 다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눈을 비비거나 할 때 계속 자극이 가는 부분이니 다시 백반증이 올라온 것 같았습니다. 이 두 부위의 백반증 때문에 제 백반증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걸 깨달았고, 마침 주 2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돼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치료를 마음먹고 대학 병원 교수님을 서치 해보았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대학 병원에서 나와 역 근처에 개원을 하셔서 그 피부과에 예약을 잡고 방문했습니다. 현재 백반증 사진과 5년 전 찍었던 백반증 사진을 비교해 보니 배는 거의 변화가 없었고, 겨드랑이와 등에는 새로 생겼고, 눈은 겉으로 보기에 티가 많이 나는 거에 비해 새로 생기진 않았었습니다. 아무래도 피부가 타면서 티가 나게 된 거 같았습니다.
먹는 스테로이드 약과 바르는 비스테로이드 연고, 엑시머, 그리고 광선을 병행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진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치료를 받은 부위가 붉게 올라오기도, 가렵기도, 따끔거리기도 합니다.
앞으로 저의 백반증은 어떻게 될까요?
주 2회 왕복 약 2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버스 타고 오가며 진료를 받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주 2회가 가능한 것도 지금 시기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진료를 시작하게 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글은 백반증 치료 과정, 백반증에 대한 저의 마인드 변화, 백반증과 저의 과거 등등 제가 지금까지 겪었던 작고 큰 백반증과의 사투에 대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특히 저의 자존감과 백반증과의 관계에 대해 고심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