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원미동에 살았다. 동네는 작고 정겨웠다. 그곳에서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엄마는 과일 가게를 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정든 동네를 떠나 이사와 동시에 엄마는 이직을 했다.
그렇게 엄마의 이직과 함께 끈질긴 건강식품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엄마가 취직한 회사는 화장품과 건강식품 등을 판매하는 곳이었고 엄마의 건강식품에 대한 열성적인 사랑은 식을 줄 모르고 20년이란 세월 동안 활활 불타올랐다.
그렇지만 그 열정은 과했다. 매우.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엄마가 주는 키토산을 꼬박꼬박 먹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 나이가 어렸기에 캡슐로 된 약을 잘 삼키지 못했고 급기야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었다.
혹시 캡슐을 잘 삼키지 못해 캡슐을 열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당장 뜯어말릴 것이다. 더군다나 그 안의 내용물이 가루형태가 아니라 액상형태라면, 또 그것이 절지동물의 단단한 표피나 연체동물의 껍질 따위로 만들어진 키토산이라면 더더욱.
캡슐을 열자 그 안에는 진득한 액상형 액체가 들어있었다. 색깔도 어둡고 무엇보다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뜯자마자 비위가 상했다. 그 진득한 액체를 숟가락에 옮겨 담고 한입에 먹었다.
그리고 연달아 물을 몇 컵씩 마셨고 양치질을 몇 번씩 연이어했다. 하지만 입안 가득 진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간 키토산은 강력했다. 혓바닥에는 여전히 색이 남아있었고 비릿한 냄새는 한참이 지나야 빠질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알약을 잘 삼키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한꺼번에 5개가 넘는 알약을 삼키는 것은 기본이요. 하루에 섭취하는 건강식품의 종류는 10가지가 넘고 한 번에 먹어야 하는 알약도 20개가 훌쩍 넘었다.
타지로 대학을 가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던 나의 대학 시절은 그야말로 건강식품의 대잔치였다. 어마어마한 종류의 건강식품과 더불어 몇 달 치 양의 건강식품을 한꺼번에 받다 보니 내 기숙사 사물함과 책상은 건강식품으로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한 학기가 지나면 다시 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엄마의 엄청난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생각날 때마다 부지런히 건강식품을 챙겨 먹었다. 워낙 양이 많다 보니 먹는 시간만 10분이 걸렸고 건강식품만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는 과한 것은 오히려 독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엄마가 챙겨주는 어마무시한 양에 비하면 정말 눈곱만큼만 섭취를 한 편이었고 이게 오히려 내 건강을 지키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20년 동안 너무 많은 종류와 양의 건강식품을 섭취한 탓일까. 건강의 적신호는 이미 엄마의 몸에 깊숙이 스며든 지 오래였고 비로소 멈출 줄 몰랐던 건강식품에 대한 엄마의 폭주에 브레이크가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는 내게 작고 알록달록한 알약을 건네기보다 엄마의 정성이 가득 담긴 집밥을 내어주시려고 노력한다.
결국 건강식품도 따뜻한 밥도 그 안에 담긴 것은 딸을 생각하는 엄마의 사랑이었다. 단지 그 형태와 방법이 달랐을 뿐이었다. 비록 건강의 적신호가 엄마를 덮쳐버렸지만 지금이라도 건강식품과 엄마를 끊어 놓고 식탁에 마주 앉아 함께 천천히 밥을 음미하며 대화할 수 있는 지금이 참 소중하고 감사하다.
오늘도 그리워질 엄마와 엄마가 해준 집밥을 맛있게, 그리고 감사히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