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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Apr 16. 2021

뜨거운 뚝배기 아래의 냄비받침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 -목공05>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Cat on a Hot Tin Roof>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영화화한 것이다. 1958년도에 영화로 만들어진 너무 오래된 영화여서 주연을 맡은 폴 뉴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멋진 모습 빼고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그런데 공방에서 이런저런 작업을 하다가 뜬금없이 이 영화가 생각난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이 영화의 제목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 car Named Desire>도 그렇지만 윌리엄스는 제목도 참 멋지게 짓는다.


영화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포스터, 제목이 멋지다.


  뭘 만들다 그랬을까? 별 것 아닌 냄비받침이다. 흔하디 흔한 냄비받침이지만 혹시라도 모델명을 짓는다면 ‘뜨뚝아냄’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어로 하면 ‘Coast under a Hot Pot’이고 느낌을 살려 우리말로 하면 ‘뜨거운 뚝배기 아래의 냄비받침’이다. 냄비받침 하나를 만들면서 오래된 영화까지 들먹이며 뭐 이리 거창하게 이름을 짓느냐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냄비받침 하나 때문에 꽤나 오랫동안 많은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목공은 남자가 하더라도 여자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험한 작업이기 때문에 주로 남자가 만들더라도 여자들을 위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감각이 무딘 남자들이야 가구나 나무로 된 살림살이에 돈을 지불할 생각이 없으니 그런 능력과 권한을 가진 여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남자들만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선물을 하더라도 여자들이 좋아할 것만 만든다. 그래야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가도 구박을 덜 받고 다음에 나를 만난다고 이름을 팔아도 되기 때이니다.


  이런 물품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도마와 냄비받침 혹은 컵받침이다. 도마는 다른 자리에서 좀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하니 냄비받침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 사실 냄비받침은 천 원짜리 두 장이면 살 수 있는 것도 있다. 소재도 쇠, 플라스틱, 천, 실리콘, 합판, 코르크, 원목 등 무궁무진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굳이 비싼 원목으로 고심해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원목’이 주는 매력 때문에 어떻게든 멋진 진짜 나무로 만들어 선물하면 모두가 좋아한다.


"Coaster"로 검색해 보면 나오는 냄비받침과 컵받침, 모양도 소재도 다양하다.


  그런데 손바닥보다 조금 큰 냄비받침이지만 원목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어쨌든 냄비만 받치면 되는 것이니 직경 15cm 정도의 냄비를 받칠 수 있는 구조로 만들면 된다. 이왕 원목으로 하려면 나무의 결과 색이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좋으니 판형으로 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렇다면 직경 15cm 정도가 되게 나무를 둥글게 오려내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절대 안 된다.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통판이라면 절대 안 된다. 바로 ‘뜨거운 뚝배기 아래의 냄비받침’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코스터(Coaster)’라는 이름으로 냄비받침을 쓴다. 그런데 우리의 냄비받침은 극한의 상황을 견뎌야 한다. 펄펄 끓는 채 상 위에 올라야 하는 뚝배기 때문이다. 금속으로 만든 냄비는 불에서 내려지면 급격하게 온도가 내려가는데 이 뚝배기는 열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식탁에 올라서도 펄펄 끓어야 하니 그 밑에 깔린 냄비받침은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보다 더 불쌍하다.


  타는 것이 염려가 되겠지만 타긴 타더라도 불타지는 않는다. 불꽃까지 일어나려면 더 높은 열이 지속적으로 전달돼야 하니 그럴 염려는 없다. 까맣게 그을리거나 부분적으로 숯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받침으로는 쓸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무엇일까? 열 때문에 일어나는 변형이다. 뜨거운 냄비 아래서 팽창했다가 냄비가 내려지면 하염없이 식어가야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나무로서는 큰 고문이다. 게다가 알뜰한 주부들은 가끔씩 물에 적신 행주질도 모자라 아예 물에 담가 박박 씻기까지 한다.


  나무, 특히 원목에게는 열과 습기가 최대의 적이다. 열을 받으면 팽창하고 습기를 받아도 팽창한다. 온도가 내려가고 습기가 없어지면 다시 수축한다. 이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뒤틀리고 급기야 쪼개지기까지 한다. 다른 소재는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운데 왜 나무만 그런 것일까? 결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결은 그저 겉에 그려놓은 무늬가 아니라 나무가 생명활동을 하던 시기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뿌리의 물을 빨아올리던 물관 구조가 작은 냄비받침에도 여전히 살아 있어 그 결을 타고 뒤틀리다 갈라지기까지 한다.


그래도 원목을 포기할 수 없으니 갖은 방법을 동원해 본다. 이건 어떨까? 뭐든 만들어 놓고는 나만의 스토리텔링을 하기를 좋아하는지라 영국 왕실에 납품한 냄비받침이라 꾸며 말하기도 한 냄비받침이다. 적당한 폭의 판재를 22.5도 각도로 잘라 맞추면 8각형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색깔 대비가 잘 되는 나무를 집성해 끼워 넣는다. 같은 나무로만 하면 밋밋하기도 하려니와 멀쩡한 나무를 잘라 결국 8각형으로 만들 거였으면 애초에 통판을 8각형으로 오리면 되는 것 아니냐는 핀잔을 듣기 싫어서이다. 만들고 나니 영국 국기 유니언 잭(Union Jack)이 되었다.


첫 번째로 만든 냄비받침, 8각으로 만들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지만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이 되었다.


  이 유니언 잭을 만들면서 시종일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끊어라!’였다. 나무의 결을 따라 휘고 쪼개지니 그럴 틈이 없이 결을 잘게 끊는 것이 목표다. 결과는 어땠을까? 희대의 ‘망작’이다. 선물했을 때는 디자인도 색도 정말 멋져서 다들 좋아한다. 그런데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산산이 조각난 사진을 보내본다. 정말 영국 왕실에 보냈다면 국가적인 망신을 당할 뻔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무의 결을 끊는 데는 성공을 했다. 문제는 사이에 낀 빨갛고 흰 나무였다. 22.5도로 끊은 삼각형 나무는 결을 따라 반지름 방향으로 수축팽창을 한다. 사이에 낀 나무 역시 결을 따라 반지름에 직각 방향으로 움직인다. 결국 둘이 합작을 해 뒤틀리고 갈라진다. 가뜩이나 삼각형 나무는 원 밖으로 달아나려 하는데 그 사이의 나무는 옆으로 벌어지며 삼각형 나무를 짜내는 형국이다. 결과적으로 대영제국을 산산이 갈라놨다.


  끊어라! 끊은 것을 엉뚱하게 이어놓아 발생한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끊는 데에만 집중한다. 통판에 회오리 물방을 넣기도 하고 단풍잎 모양으로 오려내고 잎맥을 따라 사이사이를 끊어본다. 대성공이다. 절대로 휘지 않는다. 아니, 휘긴 휠 텐데 그 휨이 구멍이나 잎맥에 막혀 끊긴다. 판재가 뒤틀리려면 우군을 만나 함께 뒤틀려야 효과가 있을 텐데 가던 길이 자꾸 막히니 결국 포기한 것이다. 나쁜 짓을 하려 해도 죽이 맞는 친구가 있어야 할 텐데 그 친구 사이를 구멍이나 잎맥이 가로막은 것이다.


끊고 뚫어서 만든 냄비받침과 컵받침, 이렇게 하면 잘 휘지 않는다.


성공적이긴 한데 왠지 모르게 허전하다. 사이를 갈라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견우와 직녀 사이를 갈라놓은 듯 뭔가 모진 짓을 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것저것 아기자기하게 모아 붙이고 상감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그렇게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몸이 달아 고민하다가 드디어 냄비받침계의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낸다.


  ‘끊어라!’하는 그 명령에 충실해 본다. 나무를 여덟 조각으로 끊는다. 심지어 각각의 판을 십자로 또 끊는다. 비뚤어지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이어라!’하는 명령도 수행해 본다.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나무 네 쪽씩 결합해 팔각형을 만든다. 결이 일치되니 반지름 방향으로 같이 수축팽창을 해서 싸울 일이 없다. 그래도 혹시 사이가 나빠질까 걱정돼 이어진 둘 사이를 파내고 나비장을 박는다. 이어 붙인 두 쪽이 멀어지려 해도 나비장 때문에 절대로 멀어질 수 없다. 심지어 가운데에 심어놓은 팔각형의 나무는 앞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잡아주고 있어 가운데도 틈이 날 수가 없다. 끊고 이어서 이보다 더 잘 만들 수는 없다.


최고의 걸작이라고 우기는 냄비받침, 물론 이것도 변형이 일어나 가운데 팔각이 덜걱거리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떨어지지, 아니 달아나지 못하고 여전히 잘 잡혀 있다.


  냄비받침으로 쓰기에는 너무 과하게 만든 것은 순전히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때문이라고 우겨본다. 이 영화 전체를 뒤덮는 암울한 기운은 바로 ‘고립’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끈이 모두 끊어진 채 파국에 이르는 인물상이 그려진다. 그런데 이 하잘 것 없는 냄비받침에서는 ‘고립’을 구현해야 한다. 한번 뒤틀리기 시작하면 결을 타고 넘어 끝을 보게 되니 그 결을 끊어 고립을 시켜야 한다. 끊어야 할 것을 끊으니 비로소 전체가 안정적인 모습을 유지하게 된다.


  살아가다 보면 ‘끊어라!’하는 명령에 충실해야 할 때가 많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유혹이 그렇다. 불안감과 우울감도 작은 파문으로 시작했다가 커다란 일렁임으로 이어진다. 적당한 선에서 끊어낼 수 있다면 삶에서의 실수는 줄어들 것이다. 불안과 우울이야 우리 곁에 늘 있는 것이니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어둑시니 귀신처럼 한없이 커지기 전에 끊어내면 가끔씩 즐길 만하다.


  그래도 혼자서는 너무 외로우니 ‘이어라!’하는 명령도 잊지 말아야 한다. 유니언 잭처럼 엉뚱하게 잇는 바보짓을 하자는 건 결코 아니다. 같은 결로 어깨를 결으면 같이 움직일 수 있어 힘이 된다. 혹시라도 멀어질까 두려우면 둘 사이에 나비로 맺음을 하면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함께라야 뜨거운 양철지붕 위에서도, 타는 듯한 뚝배기 아래에서도 단단하게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과한 냄비받침을 끊어야 할 모든 이, 그리고 다시 이어야 할 모든 이에게 바친다.


조만간 선보이려고 친구와 함께 준비중인 컵받침, 이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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