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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Apr 02. 2021

주먹 쥐고 일어서와 영혼의 기둥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 -악기01>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케빈 코스트너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늑대와 춤을 Dances with Wolves>에는 꽤나 흥미로운 것이 있다. 영화의 제목은 주인공의 극 중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디언들은 이름을 지을 때 그 사람의 특징이나 흥미로운 일화와 관련지어 짤막한 구로 이름을 짓는다. 남북전쟁 시기의 군인이었던 케빈 코스트너가 어쩌다 인디언 수우족과 접촉하게 된다. 외로움을 달래주던 늑대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수우족은 그에게 ‘늑대와 춤을’이란 이름을 붙여 준다.


영화 <늑대와 춤을> 포스터, 제목이 참 멋지다.


  등장하는 수우족의 이름 모두가 이런 식이다. 제사장은 ‘새 걷어차기(Kicking Bird)’, 족장은 ‘열 마리 곰(Ten Bears)’, 용감한 전사는 ‘머리에 부는 바람(Wind in His Hair)’이다. 영화에는 어릴 적부터 수우족과 같이 살게 된 백인 여자도 나오는데 그녀의 이름은 ‘주먹 쥐고 일어서(Stands with a Fist)’이다. 역시 수우족이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에 따른 이름이다.


  ‘주먹 쥐고 일어서’는 첼로에도 있다. ‘브릿지(Bridge)’라고 불리는 것으로 요즘은 프랑스식과 벨기에식을 주로 쓰는데 그 형상이 딱 주먹 쥐고 일어서는 모습을 닮았다. 브릿지는 현악기마다 다 있는데 일차적으로는 줄을 떠받치면서 줄과 몸체를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등 활로 줄을 그어 소리를 내는 악기에는 모두 있다.


첼로 브릿지, 보면 볼수록 '주먹 쥐고 일어서'의 모습니다. 바이올린 브릿지는 모양이 좀 다르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첼로는 사람의 몸을 닮은 통에 줄이 걸쳐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꽤 복잡하기도 하고 과학적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현악기이니 줄을 걸쳐서 마찰시키거나 뜯어서 소리를 낸다. 그런데 팽팽하게 걸쳐진 이 줄의 장력이 엄청나다. 첼로의 경우 연주가 가능한 상태로 팽팽하게 조율을 해 놓으면 네 줄을 합친 장력이 55Kg의 무게로 누르는 것과 같다. 이 엄청난 힘을 아이 손바닥 크기의 브릿지가 견디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브릿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휜다. 휘다 못해 넘어가기도 하고 완전히 부러지기도 한다. 가느다란 첼로 줄이 브릿지를 파고들어가기도 한다. 이래저래 한없이 고생스러워 보인다. 주먹을 쥐고 힘차게 서 있지만 자세히 보면 엄청나게 버거워하고 있다. 마음의 눈으로 애틋하게 바라보면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홀로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리는 소년 가장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허리가 휜 채로 손주의 사탕 값을 벌기 위해 폐지를 줍는 할머니를 떠올리게도 한다.


  브릿지는 줄을 떠받치는 부품이지만 더 중요한 기능은 따로 있다. 바로 줄의 진동을 첼로의 몸체에 전달하는 기능이다. 첼로는 말총으로 만든 활로 줄을 그어 소리를 만드는데 이 소리는 모기 소리와 비슷할 정도로 작다. 이 진동이 브릿지를 따라 첼로의 앞판에 전해져 앞판이 함께 떨 때 비로소 커다란 소리로 증폭이 된다. 브릿지가 없으면 줄을 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첼로 소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브릿지를 타고 전해진 진동은 앞판에서 멈추지 않는다. 첼로의 앞판과 뒤판은 곡면으로 된 측판으로도 연결이 되어 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뭔가가 하나 더 있다. 나무젓가락 굵기의 둥그런 막대기가 그것인데 ‘사운드 포스트(Sound Post)’라 불린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소리 기둥’ 정도가 되겠다. 이 자그마한 기둥이 브릿지의 압력에 의해 앞판이 내려앉는 걸 막아준다. 뿐만 아니라 앞판의 진동을 뒤판에 전달한다. 이 기둥 덕에 첼로는 비로소 앞판과 뒤판이 같이 울리며 멋진 소리를 만들어내게 된다.


  사운드 포스트는 별명이 있다. 현악기의 본고장 이탈리어로는 ‘아니마(Anima)’라고 하고 영어로는 ‘소울(Soul)’이라고 한다. 당연히 이 말 앞에 첼로든, 바이올린이든 붙어야 한다. 현악기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우리말로 하면 ‘영혼의 기둥’이겠고 한자로 하면 ‘혼주(魂柱)’가 된다. 어떤 말로 하든 그 중요한 역할을 실감할 수 있다.


사운드 포스트, 작지만 영혼의 기둥 역할을 한다.

  애초에 현악기에는 사운드 포스트가 없었다. 그런데 15세기에 어떤 현악기 장인이 사운드 포스트를 발견하게 된다. 특별한 효과를 노려서 그랬는지 그저 앞판과 뒤판 사이에 끼워 넣어 판의 처짐을 방지하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장착을 하고 보니 소리가 확연히 달라진다. 앞판과 뒤판을 비대칭으로 진동하게 해 줘 더 크고 웅장한 소리가 나게 된다.


  ‘주먹 쥐고 일어서’와 ‘영혼의 기둥’ 모두 첼로를 이루는 극히 작은 부품에 불과하다. 크기도 그렇고 값도 그렇다. 휘고, 파이고, 부러지는 브릿지는 소모품 취급을 받는다. 사운드포스트 역시 때가 되면 바꿔줘야 하는 소모품이다. 크기도 작으니 재료값이 얼마 들지도 않는다. 교환해 주는 장인의 공임 때문에 비싸게 느껴질 뿐 악기나 활의 값에 비하면 새발에 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역할은 무척이나 크다. 브릿지가 없으면 모양만 첼로일 뿐 첼로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사운드 포스트가 없으면 첼로의 잠재력이 반, 혹은 반에 반만 발휘된다. 아무리 훌륭한 몸통을 가진 첼로라도 브릿지와 사운드 포스트가 없으면 온전한 첼로가 되지 못한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가치를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둘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더 나은 소리를 위해 첼로를 바꾸는 건 큰 결심을 해야 한다. 부모님 혹은 은행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브릿지와 사운드 포스트 세팅을 다시 하거나 바꾸는 것만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넘어간 브릿지만 다시 세워도, 사운드 포스트의 위치만 조금 바꿔도 소리가 확연히 달라진다. 시시때때로 잘 관리하고 바꿔주면 첼로는 바꾸는 것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그래서 ‘주먹 쥐고 일어서’와 ‘영혼의 기둥’은 우리의 삶에도 희망을 준다. 혹시라도 스스로를 보잘것없게 여기고 있다면 이 둘을 바라보면 좋겠다. 꿋꿋하게 서 있으며 커다란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이 둘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이 와 버린 삶이라 느낄 때도 이 둘을 바라보면 좋겠다. ‘나’를 통째로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다리, 혹은 기둥 하나만 바꿔도 삶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리고 첼로 연주를 들을 때 ‘주먹 쥐고 일어서’와 ‘영혼의 기둥’을 생각하면 더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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