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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Apr 02. 2021

아버님의 유산, 그리고 참 죽이는 이야기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 음악02>

  음악을 하는 이 모두의 아버님이 한 분 계신다. 시냇가에 사시지는 않았지만 시내 혹은 개울이란 뜻의 성을 가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이다. 음악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첼로 연주자들에게는 은인이기도 하다. 이 분이 아니었으면 가뜩이나 빈약한 첼로 레퍼토리가 훨씬 더 빈약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과 동갑내기이고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도 있지만 이 분은 첼로에 관심이 없으셔서 남긴 곡이 없으니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의 관심 밖이다.


바흐, 시냇가에 사시는 음악의 아버지.


  이 아버님이 남긴 명곡, 제목은 몰라도 광고나 드라마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 곡, 그래서 첼로를 붙들고 있으면 “그거 한 번 해 봐.”라고 제목도 없이 신청을 받는 곡이 있다. 바로 <무반주 첼로 조곡>이 그것이다. ‘조곡’이라면 상주가 빈소에서 우는 ‘弔哭’을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한자로 쓰자면 ‘組曲’, 즉 모음곡을 뜻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라고 더 많이 한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 첫 곡이라도 제대로 연주해 봤으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반주 없이 오로지 첼로 혼자서 연주한다. 총 6개로 이루어졌는데 각각의 곡은 ‘전주곡-알라망드-쿠랑트-사라방드-미뉴에트-지그’ 등의 춤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춤곡? 익숙한 이 곡의 선율을 떠올려 보면 춤곡이란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 요즘처럼 현란한 조명에 귀를 찢을 듯한 악기 소리는 아닐지라도 여러 악기가 어우러져 쿵짝, 쿵짝짝, 쿵짝쿵짝하며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돼야 할 것 같은데 아니다. 이 시기의 춤사위가 남아 있지 않으니 알 수는 없으나 유튜브 등에 복원된 춤의 영상이 올라 있으니 보고 나면 조금 이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아버님은 첼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첼로를 위한 불후의 명곡을 남기게 된다. 이 글은 <서프라이즈>에나 나올 법한 이 곡의 탄생 비화, 그리고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글이다. 물론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가 찾아낸 이야기답게 나무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아버님이 쾨텐 궁정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할 때다. 궁정 주인인 레오폴드 대공의 셋째 아들 이름이 아프릴 둠코프(April Dummkopf, 이하 아프릴)였는데 악기 연주와 춤에 능한 재간둥이지만 소문난 난봉꾼이기도 하다. 아프릴의 특기는 아름다운 여인을 꼭 포함시킨 파티를 열고 연주자 틈에서 연주를 하다가 멋진 춤곡이 나올 때면 홀 중앙으로 나와서 미리 눈도장을 찍어 놓은 여인과 춤을 추는 것이다. 수준급의 연주를 들려주다가 갑자기 등장해서 멋지게 춤을 추니 그 모습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우아하기 그지없는 바로크 댄스


중세 유럽의 춤


  아프릴은 첼로 연주를 제일 좋아했다. 그래서 아버님을 불러 오만불손한 태도로 주문을 한다. 춤곡을 기반으로 멋진 첼로 연주곡을 작곡하라는. 대신 솔로곡이어야 한다는. 아프릴의 계획은 이러했다. 궁정 악단 사이에서 함께 연주를 하다가 다른 주자들은 모두 악기를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아프릴 혼자 멋진 춤곡을 연주한다. 흥이 돋을 무렵 첼로 연주는 다른 주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무대로 나가 홀로 춤을 춘다. 춤은 물론 우아하기 그지없는 바로크 댄스다.


  그런데 아버님은 아프릴도 첼로도 탐탁지 않았다. 그래도 명령은 명령인지라 곡을 쓰기는 하되 아프릴을 골탕 먹일 방법을 생각한다. 아프릴이 음악적 재능이 꽤 뛰어난지라 대부분 초견, 즉 미리 연습하지 않고 악보를 받자마자 연주하는 버릇이 있다는 데 착안을 한다. 며칠 고심한 끝에 악상이 떠오른다. 급하게 악보에 옮기려 하는데 오선지도 종이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아내 안나에게 받아 적으라고 시킨다. 불후의 첼로 명곡이 탄생하던 순간이다.


  이 악보가 아프릴에게 전해진다. 악보를 본 아프릴은 가볍게 웃어넘긴다. 언뜻 보기에 꽤 쉬워 보인다. ‘이 정도쯤이야’ 하면서 받은 한켠에 제껴 두고는 수고했다며 아버님께 은화 한 푼을 던진다. 이 곡의 가치를 은화 한 푼으로 갚을 수는 없지만 아버님은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그날을 기다린다.


  드디어 무도회 날, 아프릴은 계획대로 연주 중 악보를 꺼내 든다. 그리고는 첼로를 끌어안고 솜씨를 뽐내려 한다. 그런데 웬걸, 몇 줄 연주하고 나니 활이 꼬이기 시작한다. 쉬워 보이는 악보가 하면 할수록 왼손 오른손에 다 마비가 온다. 겨우겨우 버티다가 악보를 던져 버린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계획했던 춤 솜씨도 발휘하지 못한 채 무도회의 종료를 알리고는 자리를 뜨고 만다.


  분노한 아프릴은 레오폴드 대공의 총애를 받는 아버님은 차마 어쩌지 못한다. 대신 악보를 모두 수거해 불태울 것, 누구도 이 곡을 연주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이 불후의 명곡은 이렇게 나오자마자 한 번도 제대로 연주가 되지도 못한 채 사장되어 버린다. 아버님도 첼로를 별로 안 좋아하니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다. 그 해가 1717년이었니다.


  그로부터 170여 년이 지난 1889년 어느 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열세 살의 소년 하나가 어머니가 벼룩시장에서 구입해 온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한다. 첼로를 공부하고 있던 이 소년, 이름은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이다. 이 소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된 도마였다. 도마 한가운데에 희미하게 악보가 그려져 있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우연히 들었던 선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악보도 없이 구전되다시피 전해지는 곡이라 했다. 바흐의 곡이라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고 하셨다.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의 고서점을 뒤지다 우연히 보았던 악보를 떠올린다. 안나의 서명이 있는 그 악보. 카잘스는 그 서점으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필사된 악보를 손에 넣는다. 200년 가까이 잠자던 불후의 첼로 명곡이 다시 빛을 보는 순간이다.

젊은 카잘스
만년의 카잘스


  그런데 모두 불태운 줄 알았던 이 악보가 어떻게 남아있는 것일까? 사연은 이렇다. 분노한 아프릴이 악보를 모두 불태우라 했지만 아프릴에 이어 첼로를 연주하기로 한 첼리스트 아벨(Carl Friedrich Abel)의 기억마저 불태우지는 못했다. 아벨은 안나를 찾아가 그 곡을 복원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바흐에게 다시 써 달라고 하면 되겠지만 아프릴에 대한 미움 때문에 바흐는 거부한다. 결국 안나와 아벨이 기억을 되살려 전곡을 되살린다. 그리고 안나는 그 악보를 몰래 간직하다가 딸에게 전한다.


  아프릴에게 쫓겨날 것이 염려스러웠던 아벨은 곡을 머릿속에만 기억하고는 악보는 따로 받지 않는다. 그리고 몇몇 연주자들에게 직접 연주해 주며 후대로 전한다. 이렇게 연주자에게 구전되던 이 곡이 카잘스의 선생님께도 이어졌던 것이다. 신은 이 명곡을 연주자들의 기억에 남겨 지켜주신 것이다.


로스트로포비치 연주 바흐 첼로 무반주 모음곡 1번 프렐류드


안나의 필사 악보


  도마는 어떻게 된 것일까? 아버님의 머릿속에 악상이 떠오른 날 악보는커녕 종이도 없자 안나는 급하게 도마 뒷면에 받아 적는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도마를 어디엔가 처박아 둔다. 그런데 그 도마가 170여 년을 버틴다. 썩거나 불타기 쉬운 나무를 감안하면 드문 일이지만 불후의 명곡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렇게 많은 우연들이 필연처럼 엮인다.


도마 위에 그려진 악보, 물론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의 조잡한 '뽀샵' 결과물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나무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버틴다는 나무 '샤름 쥐셰(charme juché)'다. 프랑스가 원산지인 이 나무는 ‘매력적인 꿩 둥지’라는 뜻의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그 이름과 함께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간다. 독일에서는 ‘카르메 유크(Carme Juk)’, 영어에서는 ‘참 주크(Charm Juke)’로 불리는 이 나무가 마침내 한국에도 전해져 ‘참죽’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결과 색이 멋져 고가구의 앞판으로 많이 쓰이는 나무다. 그 이름 때문에 ‘참 죽이는 나무’라며 사랑받는 그 나무다.


  불후의 명곡을 작곡한 아버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명곡을 지킨 안나와 아벨, 그리고 그것을 우연히 발견해 낸 카잘스에게도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이 난봉꾼이 없었다면 이 곡은 아예 탄생하지 못했을 테니 ‘사월의 바보’인 아프릴 둠코프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래도 감사의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면 사월(April)의 첫날에도 늘 맑은 영혼으로 세상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바보(Dummkopf)인 우리 모두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제 남은 몫은 샤름 쥐셰, 아니 참죽에게 돌려야 한다. ‘참죽’은 ‘참 죽이는 나무’가 아니라 죽나무는 죽나무이되 진짜 죽나무란 뜻이다. 이 나무의 형제뻘 되는 나무가 ‘가죽’이다. 가죽나무는 가짜 죽나무란 뜻이다. 가죽나무만 아는 사람들은 이 나무가 가죽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이 나무의 이름을 ‘가중나무’라고 쓰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역에 따라 참죽나무와 가죽나무가 뒤바뀌기도 한다. 즉 뭐가 진짜이고 뭐가 가짜인지 헷갈린다는 것이다.


  참죽도 나무이고 가죽도 나무이니 사실 뭐가 진짜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인간이 어느 하나를 먼저 진짜라고 하고 그와 비슷한 것을 가짜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 식물의 이름을 보면 ‘너도’와 ‘나도’가 붙은 것이 꽤 있는데 이도 마찬가지다. 가장 흔히 알려진 ‘너도밤나무’는 밤나무와는 전혀 다른 종인데 열매가 밤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너도 밤나무라고 해 줄게’라고 취급되는 나무의 처지에서 보면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다.


참죽으로 만든 도마, 색과 결이 예술이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뭐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알 수 없다. 전해지는 악보에는 빠르기를 비롯한 악상 표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섯 곡 모두 춤곡 형식이니 부분별로 붙어 있는 춤의 이름에 따라 리듬과 빠르기를 가늠할 따름이다. 이 곡을 다시 발견한 것이 카잘스이고 그만의 해석을 통해 처음으로 녹음을 한 것도 카잘스이니 그의 연주를 전범으로 삼아 연주자마다 새로운 해석을 할 뿐이다.


  그래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야 할 필요는 있다. 아프릴 둠코프의 가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곡의 구성과 전개에 관한 진짜 이야기를 이해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연주를 들으면서 이 곡을 작곡한 아버님의 참뜻과 이 곡을 해석해 자신의 방식대로 연주한 첼리스트의 참된 열정이 전해진다면 더 좋을 것이다. <수학의 정석> 1장 집합론 부분만 때를 묻히는 것처럼, <신약성경>의 마태복음에만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이 모음곡 1번 프렐류드만 아는 분들은 여섯 곡 전부를 들어보시길 권한다. ‘진짜 첼로’를 느끼 수 있다. 틀림없이.


※4월의 첫날에 '4월의 바보(아프릴 둠코프, April Dummkopf)'를 위해 쓴 글이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를 너무 많이 믿은 나머지 확대 재생산되어 세상에 퍼져나가서는 안 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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