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를 사랑하는 목수 - 음악03>
“꿈 깨! 귀머거리, 1층이나 펜트하우스 복층, 그리고 정기 상납 자신 있어?”
모임에서 왁자지껄하게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선배가 한 방 날린다. 이름을 말하면 금세 알 수 없는 피아니스트와 결혼한 선배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만난 부인은 하얀 날개옷을 입은 선녀 같았다. 모두들 그 결혼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나무꾼 주제에 이 양반이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 이 세 가지를 군말 없이 견딜 수 있으면 부러워하란다.
귀머거리는 뭔 소리일까? 결혼 전에는 일요일 아침에 늦잠을 자다 감미로운 연주에 잠을 깰 줄 알았단다. 그런데 아니다. 늘 손가락이 꼬일 정도의 초절정 기교가 필요한 부분만 반복적으로 듣는단다. 잘 되는 부분이야 많은 연습이 필요하지 않으니 잘 안 되는 부분만 끈질기게 연습하신단다. 듣다가 외우는 것은 기본이고 직접 치라고 해도 칠 정란니다.
1층? 펜트하우스 복층? 아파트로 이사를 가려면 무조건 둘 중의 하나란다. 1층에 입주해 천장과 벽만 잘 매조지하면 그나마 이웃들의 등쌀로부터 해방된다고 한다. 아니면 복층으로 된 꼭대기 2층에 무거운 그랜드피아노를 들여야 한단다. 1층에서 창밖의 나무들을 보며 지내는 것도 좋지만 다른 층에도 살아보고 싶단다. 복층 구조의 펜트하우스 한 층을 피아노에게 빼앗긴 것도 싫은데 부인도 빼앗겨 독수공방 아닌 ‘독수공층’을 해야 하는 것도 싫단다.
그리고 1년에 한두 번 무조건 상납. 다름 아닌 연주회를 위한 비용이다. 연주자는 연주 무대에 설 때 가장 아름답다. 톱클래스의 연주자가 아닌 한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무대를 마련해야 한다. 다른 전공 교수들이 논문을 쓰듯이 음대 교수들도 정기적인 연주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정기적인 연주회를 해야 현역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무수한 초대권으로 이루어지는 연주회이니 세금을 내듯 그 비용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단다.
듣다 보니 더 배가 아파진다. 찡그린 얼굴로 싫은 듯이 말을 하고 있지만 결국 이 선배는 팔불출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음악에 대한 부인의 열정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다. 멋진 연주를 들려주기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며 외조를 하고 있는지 에둘러 말하고 있다. 날개옷을 입고 훨훨 천상으로 날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가득해 보인다.
음악을 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떨까? 생각만 해도 멋지다. 길고도 고운 흰 손가락이 건반 위를 달리며 멋진 선율을 선사하는 이가 내 사랑이라니...... 아름다운 곡선의 첼로를 꼭 끌어안고 말 탄 전사처럼 네 줄 위를 달리며 멋지게 활을 쏘아대는 이와 사랑에 빠지다니...... 섬세한 감성에 멋진 외모까지 갖췄을 것으로 기대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듯하다.
연애는 첼로와, 결혼은 피아노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음악평론가의 연애관이자 결혼관이다. 물론 악기와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연애는 첼로를 하는 이와 하는 것이 좋고, 결혼은 피아노를 치는 이와 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굳이 첼로가 아닌 바이올린이나 비올라도 좋단다. 다른 말로 하면 현악기 연주자와 연애하고, 건반악기 연주자와 결혼하라는 말이다. 연애는 가슴으로 하고 결혼은 머리로 하라는 것이 이 평론가의 지론이다. 현악기 연주자들은 감성이 풍부해 격정적이란다. 이에 반해 피아노 연주자들은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해 논리적이란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찌 보면 맞는 것 같다. 현악기나 피아노 모두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지만 악기의 메커니즘이 근본적으로 다르니 연주하는 방법도 많이 다르다. 같은 악보를 보고 있다면 각각의 악기로 동일한 선율을 만들어 내야 한다. 피아노 연주자는 악보가 지정해 주는 건반을 누르면 피아노가 알아서 해당 음을 내 준다. 그러나 현악기 연주자는 한 손으로는 음의 높낮이를 맞추어야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활로 현을 마찰시켜 소리도 만들어 내야한다. 피아노 연주자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소리를 뽑아내면 되지만 현악기 연주자는 소리부터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구조나 작동 면에서 보면 악기 중에서 피아노가 가장 기계적이다. 그저 건반에 따라 정해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한 손으로 음의 높낮이를 만들어내는 현악기처럼 음 높이의 미묘한 변화를 줄 수도 없고 현악기에서 많이 쓰는 비브라토도 쓸 수 없다. 말 그대로 기계적이다. 이에 반에 현악기는 단순하게 말하면 나무 몸통에 줄만 걸어놓은 것이어서 나머지는 연주자 마음대로 낼 수 있다. 전혀 기계적이지가 않다.
이러한 악기의 특성이 사람의 성격과 관련이 있을까? 조금 관련이 있을 듯도 하다. 만들어진 소리만 낼 수 있는 연주자와 소리를 만들어야 하는 연주자는 성격이 조금 다를 수 있다. 애초부터 각각의 성격 때문에 서로 다른 악기를 택했을 수도 있다. 비슷한 성격이었지만 오랫동안 어느 한쪽의 악기를 하면서 성격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해도 전반적으로 피아노 전공 학생들이 더 딱딱하고 차갑고 이성적이었다. 이에 비해 현악 전공 학생들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감성적이었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의 편견이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목수’으로서의 객관적인 시각이다.
그렇지만 악기의 쉽고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건반을 누르기만 하면 만들어진 소리를 내주는 피아노가 더 쉬워 보인다. 초보자한테는 맞는 말이다. 초보자한테 동요 <산토끼>를 주면 피아노로는 독수리 타법이지만 토끼가 깡총대기는 한다. 그러나 현악기로는 끽끽 대는 소리에 토끼가 사경을 헤맬 지경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니 피아노가 더 쉬워 보일 수 있다. 아이에게 피아노를 사 주면 머지않아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현악기는 1년이 지나도 소음만 듣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초보자에게만 해당된다. 피아노 악보는 기본적으로 두 줄이고, 손가락 모두를 써서 동시에 10개의 음을 내도록 작곡할 수도 있다. 이미 소리가 만들어져 있으니 최대한 연주자를 괴롭혀 멋진 음악이 되도록 할 수도 있다. 왼손과 오른손으로 음을 쌓기도 하고 나누기도 해서 손가락이 꼬이게 하고 짧은 손가락을 원망하게도 한다.
이에 반해 현악기는 활로 연주할 때 동시에 낼 수 있는 음은 기껏해야 둘이다. 별짓을 다해서 많은 음을 낸다 해도 줄이 네 개밖에 안 되니 많아야 네 음이다. 그러니 악보는 상대적으로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낼 수 있는 음의 수가 제한된 악기로 최대한 멋진 소리를 만들어 내고 싶은 작곡가들은 현악기 연주자들을 엄청 괴롭힌다. 손가락 꼬이고 활은 날아다니게 된다.
어차피 똑같다. 프로 연주자의 경지에 이르면 쉬운 악기와 어려운 악기의 구분이 없다. 각각의 악기가 가진 특성 안에서 최대치의 연주를 뽑아내야 하니 결국은 똑같이 어렵다. 국악으로 치자면 곡의 시작과 끝에 딱 두 번 치는 박 연주자나 시종일관 두 줄 위를 달리며 활을 그어대야 하는 해금 연주자나 힘들긴 마찬가지다. 유치원생 꼬마 아이나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모두 살기 힘들어 죽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도 하다.
악기의 쉽고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니 결국 성격의 문제로 돌아가야겠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가? 첼로를 연주하는 사람이 더 직관적이고 감성적인가? 악기의 성격 때문에 조금은 그렇게 보이기는 해도 이것 또한 결국은 똑같다. 연주를 하려면 곡을 해석해야 하고 그것을 자신의 악기로 표현해야 한다. 첼로 연주자도 충분히 이성적으로 곡을 해석하고, 피아노 연주자도 충분히 감성적으로 곡을 연주해 낸다. 이성과 감성 어느 하나만으로는 멋진 연주가 불가능하니 결국은 둘 다 갖추어야한니다.
그렇다면 애인은 감성적이어야 하고, 배우자는 이성적이어야 하나? 이것 또한 영 아니다. 연애할 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니 감정에 사로잡혀 흥에 겨워 지내도 되나? 결혼해서는 말 그대로 먹고 살아야 하니 이성의 깃발을 바짝 세우고 삶의 무게를 버거워 하며 지내야 하나?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 있다면 애인으로서나 배우자로서 모두 적절하지 않다.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진 이들은 결혼하고 나면 잔소리꾼 아내나 밖으로만 떠도는 남편이 되기 쉽다.
연주를 하기 전에 모든 악기는 반드시 모두 조율을 해야 한다. 피아노는 88개의 건반마다 여러 개의 줄이 각각 연결되어 있으니 전문가 해야 합니다. 현악기는 네 줄밖에 안 되니 연주자가 한다. 우리 성격의 많은 부분은 피아노의 현처럼 태어날 때부터 조율이 되어 있다. 그리고 가끔씩 조율사의 손길을 거치듯 인생에서 몇 차례 굴곡을 겪으며 다시 조율이 된다. 매일매일의 삶은 쉽게 늘어나고 팽팽해지는 현처럼 변화가 심하다. 그때그때 조율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피아노 연주자일지 첼로 연주자일지 알 수가 없다. 만나서 조금씩 조율해 나가다 보면 서로의 음이 맞아 간다. 때로는 현악기의 음높이처럼 조금은 격정적으로 살게 되고 때로는 피아노의 음높이처럼 기계적으로 살게 된다. 그렇게 맞춰나가는 것이니 피아노를 연주하는 애인이든, 첼로를 연주하는 애인이든 가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피아노와 첼로, 혹은 애인과 배우자에 대해 자신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편견을 먼저 조율하는 것이 더 급하다.
선녀 피아니스트와 결혼한 선배는 음악을 잘, 아니 전혀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귀머거리, 1층, 정기 상납’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생각해보니 이 선배는 해금 연주를 위한 활과 같은 사람이다. 팽팽하게 조이고 써야 하는 첼로 활과 달리 해금 활은 말총이 축 늘어진 채 사용한다. 그래도 두 줄 사이와 울림통 위를 스치듯 지나다니며 온갖 음과 소리를 모두 만들어 낸다. 선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나무꾼이었으니 첼로를 하는 아내를 만났어도 팔불출로 이 세 가지를 즐기고 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