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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아 Oct 20. 2024

우물 속 빅뱅 (마지막화)

간절하게 마음을 모으면

내가 유안에게 우물 이야길 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했던 말들이 이제 점점 희미해지면서 곧 사라질 연기처럼 내 주위를 둥둥 떠도는 것만 같아서 서러운 기분이 든다.

내가 태어난 시골 마을에는 300년이 넘은 수령의 당산나무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5미터쯤 되는 깊이의 우물이 있었다. 나중에 그 우물은 폐쇄되었는데,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사람들이 거기서 물을 퍼 가곤 했다. 생활용수로 쓰려던 건 아니고 그 우물물이 영험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물을 퍼 가서 그릇에 담아 놓고 기도를 하거나 아픈 곳에 바르곤 했다. 진짜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효험이 있느냐 없느냐 같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우물 속에 빠진 적이 있었다. 실은 빠졌다기보다는 내 발로 들어갔다가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그해에는 가뭄이 심하게 들어서 논바닥이 갈라지고 우물도 다 말라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우물물을 긷지 못해서 상심했고, 단체로 우울증에 빠진 것만 같았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당산나무 우물이 마른 적은 없었다면서, 이게 대체 무슨 변괴냐고 한탄했다. 나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물이 진짜로 다 말라버렸는지 아닌지. 사실은 물이 있는데도 어떤 이유 때문에 두레박이 물에 닿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우물 안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어두컴컴하기만 했고 그 끝을 알 수가 없었으니까.

벽을 돌로 쌓아 올린 돌우물이었기 때문에 우물 안쪽의 울퉁불퉁한 돌들을 잘 딛고 내려갔다가 올라오면 될 것 같았다. 무섭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오히려 겁날 것도 없었다. 다치고 깨지고 혼자 남겨져 보고, 그런 경험이 쌓인 후에야 실제보다 앞서가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뿐.

나는 바닥에 책가방을 내려놓고 운동화와 양말도 벗어놓고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돌과 돌 사이의 틈새에 발을 딛고 천천히 내려갔다. 내 손바닥과 발바닥에 닿던 돌의 차가운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만졌던 엄마의 얼굴도 그렇게 차가웠기 때문이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아래로 내려가면서 엄마가 내게 주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나의 긴 머리카락을 땋아주던 순간이라든가 무릎 위에 내 머리를 눕히고 귀를 파주던 순간처럼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들을. 

그랬더니, 

갑자기 그 좁은 우물 속이 우주처럼 무한해지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수없이 많은 별들이 폭죽처럼 터지면서 나를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기억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뜨거운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할머니는 내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너도 네 엄마의 그 못돼먹은 피가 흐르는 거냐고 소리치면서.

나는 지금 우주처럼 무한해지던 그 우물 속에 있는 것만 같다. 내 주위로 불꽃이 마구 튀면서 나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내 몸은 점점 작아지는데, 유안과 함께 나눈 기억들은 이 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랗게 부풀고 있다. 이 이상 더 좋은 게 있을까. 나의 마지막은 이렇게 그 애로 촘촘히 채워졌는데. 시간도 공간도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해졌는데.

그러니까 나를 생각하면서 너무 아파하지는 않기를. 나의 마지막이 어땠을지 자꾸 떠올리지 말기를. 

나의 기억은 내가 마지막 숨을 내쉬었던 그곳에 있지 않다. 그 애와 함께 걸었던 모든 길이 지금 내 앞에 갈래갈래 펼쳐져 있다.


∞ 


너에게 이런 내 생각을 들려줄 수 있을까. 간절하게 마음을 모으면 너에게 전해질까. 


∞ 


타닷타닷. 파바바밧. 

어둠 속에서 아름답고 경이로운 빛이 터져나온다.

나는 지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지극히 높은 온도와 밀도로 압축된 기억들이 내 안에서 한 점으로 모였다가, 

기어이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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