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해준 한마디
넌 훌륭한 가족을 만들었잖아!
정말 위로가 되는 한마디였다. 52년이나 살았는데 뭔가를 이룬 것도 하나도 없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그냥 밥만 해 먹고살았구나 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둘째 언니가 카톡으로 던진 한마디였다.
나 : 우리 큰딸 대학원 합격하고 교수들한테 인정받는 느낌이라고, 살면서 이런 느낌 처음이라고 하더라. 그동안 맘고생 엄청 많았잖아. 맨날 자기는 루저라고 하면서 울고 그랬는데...
언니 : 나는 회사 생활하면서 서른 넘어서 그런 느낌 들었었는데 니 딸은 엄청 빠른 거야.
나 : 아, 다들 좋겠다. 나는 아예 그런 느낌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데. 뭐 이룬 게 있어야지 뭐.
언니 : 왜. 넌 훌륭한 가족을 만들었잖아.
언니는 대화의 마무리로 그냥 던진 말이었겠지만 하루 종일 생각나는 기분 좋은 말이었다.
결혼 전에는 연봉도 꽤 받는 외국인 회사에서 (그 당시는 영어만 좀 하면 취직하기가 지금보다 훨씬 쉬웠다.) 별 스트레스 없이 일도 재미있게 하고 했는데 결혼하면서 경력 단절이 됐다. 결혼하면서 느닷없이 스리랑카로 가서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전업 주부의 길로 들어섰다.
남편 무역 일로 스리랑카에 8년 정도를 살면서 딸 둘을 낳고 키웠다. 그 후 캐나다로 이민 와서 밴쿠버에서 18년째 살고 있다. 가장으로서 낯선 땅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 남편을 위해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도왔다. 나 스스로 뭔가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보니 어쨌든 남편을 세워서 크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이민 오자마자 초등학교 들어갔던 딸들이 지금 24살, 22살로 대학교를 졸업하는 나이가 됐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둘째가 대학을 들어가는 해에 엄청난 성취감을 느꼈었다. 뭐 대단한 걸 이루었다기보다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드디어 마무리했다는 느낌. 여기까지 했으면 이제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고 이제부턴 아이들이 스스로 헤쳐 나가면 된다 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지. 아이들의 사춘기와 방황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들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아파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나 또한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
전업주부가 해야 할 또 하나의 큰 일은 '밥'.
동네마다 넘치는 밥집에 뭘 시켜먹을까 고민하는 한국과 달리, 우리 사는 동네는 마땅히 가서 사 먹을만한 한국 식당도 한국 반찬 가게도 없다. 즉, 이 말은 내가 혼자 우리 가족의 삼시 세끼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부엌일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정말 징글징글한 일이다.
아침에 국이 있어야 하고, 한식으로 밥을 먹어야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있다.
반면 이곳에서 자란 탓인지 한식보다는 샐러드나 오트밀 같은 살 안 찌는 영양식만 먹으려 하는 두 딸이 있다.
결국 내가 온 가족의 식성을 맞춰가며 식사와 도시락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한두 군데만 가서는 해결이 안 된다는 얘기다. 한국 마트, 중국 마트, 코스코, 유기농 마트, 야채가게... 바쁘다 바빠.
정말 숨차게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남편도 자리 잡고 편안히 먹고살 만 해졌고, 아이들도 무사히 대학 졸업까지 하고 큰애는 대학원에 합격했고, 둘째도 다행히 꽤 괜찮은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모두 건강하고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런데 나는? 난 뭘 이루었지? 갑자기 할 일도 없어졌다. 갑자기 공허해졌다. 내가 너무 작아졌고 식구들에게 다 녹아들어 내 색깔은 없어졌다. 맘이 우울하니 몸도 아프다.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이런 나에게 타이밍 딱 맞춰서 언니가 날 위로해준 것이다.
"넌 훌륭한 가족을 만들었잖아."
그래, 나도 뭔가를 했네. 그럼 나도 꽤 잘 살아왔네. 그렇지?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날 위해 에너지를 좀 써볼까?
바닥난 자존감을 되살리기 위해 뭔가를 해봐야겠다.
제일 먼저 나를 찾는 작업부터 하려 한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