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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김작가 Jun 05. 2022

떨고 있다

퇴촌 작업실


떨고 있다.
따사로운 봄볕에도 바람결에 떠는 꽃잎처럼 그렇게.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그러다 모두 떨어져 나가더라도...

그 바람에 상처가 날까 두려워 눈물부터 흘리고 마는 바보가 되어 기다렸던 사람을 안아주지 못할지 모른다. 

옛 연인이라도 만나는 건가.

나에게 현실은 늘, 옛 연인처럼 불안하게 다가오지만 결국 안아주고 간다.

그렇게 아픈 시간을 보내고도 포옹 한 번으로 이런 시간을 이겨내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만다.


오늘은 작업하던 삽화를 출판사 대표님께 넘겨주기로 한 날이다.

그림을 놓고 산지 오래된 미술 전공자에게 일을 맡긴다는 건 취미로 미술을 하는 사람에게 의뢰하는 것보다 무모한 선택이란 걸 안다.

상상력이라고는 모두 날아가버린 건조해진 피부 위에
젊은이의 색을 입혀 가능성을 보여주려 노력해본다.

작업을 계속해왔더라면 신선함은 아니더라도 원숙함은 있었을 테지만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났다는 구질구질한 변명으로 살아온 결과의 실체를 들여보게 될 두려움과 어리숙함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만 나의 선택 또한 예술가적 기질을 다시 꺼내보도록 하는 쪽에 손을 들었으니 훈련의 기회로 삼고 감사할 뿐이다.

이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처럼 조형작업 또한 움츠리고 나오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를 꺼내 표현해내고 싶다.

삽화를 개인의 작업으로 볼 수는 없지만 충분한 연습의 기회가 된다.

연습이란 건 망가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연습장을 책으로 내어 주시는 것에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이건 일이다 생각하고 가볍게 넘기려고 한다.

다행히 나이가 조금 차니 나에 대해 관대해졌다.

앞으로도 나에게는 유난히 관대해질 예정이다. 


이번 그림은 에세이에 들어가는 것인데 50장을 그려야 한다고 하셨다.

어른들의 에세이에 무슨 그림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토를 달지 않았다.

그냥 그렸다. 그리면서 화가 났다. 똥개 훈련인가? 맞아, 훈련이구나. 

그렇게 난 또 감사했다. 훈련하게 해 주셔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해 준 대표님은 나에게 귀인이다.

내가 너무 멋진가?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어떤 이유이건 나에게 주어진 기회는 내게 온 선물이며 행복하게 사용하면 되는 것이지.

이번 삽화는 오일파스텔로 작업했는데 오일파스텔의 부드럽고 쫀득함을 마음껏 느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이 아니고서야 50장을 그려댔겠냐고.

두 번째 삽화다. 처음에도 50장, 이번에도 50장. 감사한 노동.


그러나... 떨고 있다.

작업을 마쳤다고 만나기로 했지만 마음으로는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더는 못하겠고 빨리 장수를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을 더 이상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몇 작품은 마음에 들었지만 나머지는 별로여서 괴로웠지만 그냥 끝내고 싶었다.

사실은 다 별로라고 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말할 분이 아니란 걸 알지만 별로인데 좋게 말하는 느낌이면 더 괴로울 것도 같았고.

약속보다 15분 늦게 오신다고 했는데 그 시간 동안 내려간 위액이 우산리의 계곡물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소심한 인간 같으니...

아니면 말라 그러면 되지. 뭐가 걱정이람하면서도 평가받으며 내려갈 자존감이 두려웠나 보다.

그 따위의 생각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거 아닌가.

다 알고 있고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

그냥 나대로 하면 된다.

대표님은 시간 맞춰 오셨는데 양봉을 하다 오셔서 그런지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숱이 더 없어 보였다.

얼음을 가득 넣어 커피를 한잔 드리고 삽화를 건넸다.

첫 장을 보시며 훌륭하고 예술이라고 하셨다.

그럴 줄 알았다. 나쁜 말은 안 하시니까..."정말요? 그 정도는 아닌데..."반문했다.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요, 너무 훌륭한데".

 귀인인 게 분명하다. 


대표님이 떠나고 나니 날아갈 것 같았다.

작업할 때 날개가 달려야 하는데 끝나니 날개가 달렸다.

50장을 작업하는 중 날개가 돋고 있었나 보다.

이제 날아보자. 

이 날개를 사용할 수 있는 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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