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앨리스의 눈물
분야: 소설
2023년 9월 5일 수정
저자: 브런치스토리 작가 호곤 https://brunch.co.kr/@hogon
목차
프롤로그: 엄마와 딸의 마음속엔 같은 아이가 산다
1. 앨리스의 눈물
2. 데레사의 남동생
3. 마리아의 자장가
4. 앨리스의 남동생
5. 데레사와 한국전쟁
에필로그: 모녀 무의식 치유 글
앨리스는 같은 건물 7층의 구내식당에서 긴 줄을 선 뒤 점심 식사를 막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는 길이었다. 여동생 로사의 부재중 전화가 떠있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근무시간임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문자메시지만 보낸 게 아니라 전화를 했다면 무언가 결정을 빨리 내려야 하는 일이었다. 함께 온 동료는 먼저 사무실로 내려가라고 말한 뒤 앨리스는 여동생 로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카톡 봤어?"
"왜? 아직 못 봤어. 요즘 인수인계받느라고 휴대폰 볼 새가 없어"
"외할머니 돌아가셨대."
"아, 많이 아프셨대?"
"몰라, 엄마는 아빠하고 같이 출발하셨대"
"장례식장이 어딘데?"
"일산이라는 것 같아, 언니는 회사 언제 끝나? 만나서 같이 갈까"
"넌 혼자 갈 거야? 제부랑 같이 갈 거야?"
"그냥 혼자 갈 거야."
"그래, 그럼 나도 혼자 가야겠다. 팀장님한테 물어보고 연락할게."
이 떨리는 메시지가 앨리스 폰으로 전달된 건 2022년 5월 26일 목요일 오전 9시 19분이었다. 친정 가족이 모인 단톡방에 엄마가 올린 메시지였지만 진동으로 되어있던 휴대폰에서 잠들다 앨리스 눈에 읽힌 건 4시간이나 지나서였다.
"모친 故 정 마리아 님께서 2022년 5월 25일 소천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여동생 로사와 통화를 마치고 앨리스는 곧바로 엄마 데레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링" 벨 소리만 허공에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이동 중인 걸까 도착해서일까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앨리스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실까 양치를 할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휴대폰에 엄마의 전화번호가 떴다.
인수인계로 정신없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통화를 하는데 평소와 다르게 울먹거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앨리스의 목소리도 같이 떨리게 했다. 마치 남처럼 살면서 얼굴도 몇 번 못 본 외할머니인데 부고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나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흑흑 알았어 엄마, 이따가 갈게"
"아냐, 너희들은 안 와도 돼."
"엄마가 갔는데 우리도 가야지."
"그래, 너희도 올래? 고마워"
엄마 데레사와 예상치 못한 통화를 마친 뒤, 앨리스는 훌쩍이던 눈물과 콧물로 온통 얼룩져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곧장 화장실로 가서 수돗물을 콸콸 틀었다. 세차게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고 연거푸 얼굴을 닦았다. 흐르는 물과 함께 외할머니의 인생도 씻겨나가는 듯했다.
외할머니 마리아의 인생은 흐르는 물과 함께 비누거품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 후로 남편을 잃은 외할머니의 인생, 딸아이를 끝까지 키우지 못하고 다른 공간에서 지내야 했던 외할머니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한 여자의 일생이 이렇게 사라지는데 내 주변은 하나도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로 자꾸만 뿌옇게 변하는 거울 속 앨리스의 얼굴을 다듬으며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을까 떠올렸다.
지금은 칠순이 넘은 엄마가 예순이었을 때, 엄마는 환갑잔치를 집에서 하고 싶어 했다. 외가친척은 외할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이모가 있었다. 모두를 집으로 초대해 일산에서 멀리 수원까지 오신 할머니는 한 손을 이마에 얹고 "내가 멀미를 하나보다"라고 말하며 거실에 힘없이 앉아 계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축 처진 할머니의 가녀린 어깨를 겨우 잡고 한 발짝씩 부축해 방으로 모셔 편히 누워계시게 했다. 가까이에서 외할머니를 본 기억은 그게 마지막이다. 그 뒤로 앨리스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었다.
"엄마. 신랑하고 같이 외할머니한테 인사 가고 싶은데 언제 갈까?"
앨리스는 결혼한 뒤로 문득 외할머니 마리아가 생각날 때면 엄마 데레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단호하게 그럴 필요 없다고 하셨다. 앨리스는 첫아이로 딸을 낳아 키우다 문득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엄마, 외할머니한테 손녀 보여드리러 갈까?"
엄마는 "그럼 이번 명절 전에 갈 테니 같이 갈까?" 하셨지만 막상 걷지도 못하는 갓난아이와 함께 먼 길을 가는 일이 힘들게만 느껴져 한 해 두 해 미루다 보니 어느새 둘째가 생겼다. 일곱 살 터울로 생긴 둘째를 낳고도 외할머니에게 인사를 가야겠다는 생각만 뿌옇게 했지 뚜렷하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째가 27개월이 되었을 무렵 외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결국 외할머니는 앨리스의 신랑도, 앨리스의 딸과 아들도 한 번 못 보고 돌아가셨다. 한이 될 것까지는 아니지만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앨리스는 엄마 데레사와 통화를 할 때 더 눈물이 왈칵 쏟아졌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