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아프면 다 무너질 것만 같아서.
이 나라에서는 일반의라고도 불리는 가정의(general practitioner, 줄여서 흔히 GP라고 부름)가 있다.
한국에는 없는 제도로, 일단 이곳에서는 누구든 아프면 소염제를 받고 싶든 종합병원에 외래를 가고 싶든 가정의(GP) 찾아가야 한다.
보통 거주지 주소를 기준으로 근처에 있는 가정의(GP)에 환자로 등록해 놓고, 심신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이상 증상이 나타났을 때 본인을 담당하는 가정의(GP)에게 찾아가 진료를 받는다. 이후 가정의(GP)에게서 소견서를 받아야 상급병원 진료 예약을 잡을 수 있다. 일명 1차 진료를 제공하는 의사인 셈이다.
어느 가정의(GP)를 만나느냐에 마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에 차이가 있는 편이다, 혹자는 본인은 정말 발이 아픈데, 푹 쉬면 된다면서 좀처럼 약을 처방해 주지 않거나 진료의견서를 써주지 않아 다른 가정의(GP)로 변경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곤 했다.
나와 남편이 등록한 가정의(GP)는 권위적이지 않고, 증상을 이야기하면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예약을 잡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거나 꺼리게 되진 않았다. 하지만 심리적인 거리감이 컸다.
병원이라는 높은 문턱
한 번은 남편이 어쩐 일인지 탈이 나서 며칠 밤낮을 고생하다가 가정의(GP)를 찾아갔는데, 약은 처방 해 주지 않았다. 2주 정도 푹 쉬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라는 말을 듣고 돌아와야 했다.
2주 뒤 다시 찾아갔다. 나아지지 않고 계속 아팠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피검사를 받아볼 수 있게 예약을 잡겠다는 것이다. 내시경이나 엑스레이 검사도 아니고 말이다. 피검사 마저도 바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거의 1주일을 다시 기다렸다. 결과 역시 또 1주일.
조금 극적으로, 이러다가는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악화되서 고꾸라지거나, 자연 치유돼서 다 낫거나.
한 달 정도를 오롯이 아프면서 남편의 몸이 가진 면역력만으로 원인모를 아픔을 이겨냈다. 전문적인 검사와 진단을 받은 적도 없으니 원인 모를 이라는 형용사를 덧대서 설명할 수밖에,
결론적으로는 몸이 스스로 치유한 것이니 잘된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아프고 고생했던 나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다시 한번 이곳에서 병원은 생각보다 멀리 있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쓴웃음이 나는 일이었다.
온몸으로 그 아픔을 견디고 난 뒤 시간이 치유해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다.
지금이야 이 정도로 끝났지만, 이 나라에서 심각한 질병에 걸리면 어쩌나 라는 아득함을 느낀다. 진단받고 각종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고, 끝내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에 다다르기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게 될까 싶은 아득함.
이 나라에서 지내다 보니 병원은 장애물을 넘고 긴 인내심의 터널을 거쳐야 만날 수 있을 법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대상이 돼버린 셈이다. 한국의 여느 도시에서 그럴 수 있듯, 한 사거리에 있는 상가 안에 걸어가 내과를 방문하고 약을 처방받을 수 있던 편리함과 신속함이 주던 믿음직함.
그 심적 안정감이 사라져 버리니 생각보다 병원의 문턱은 높고 멀었다.
살면서 매일같이 병원에 가지는 않지는 않는다, 감사하게도.
하지만 병원과 나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생각에 조금만 갑자기 피부에 무언가 올라오거나 속이 아프면 막막한 마음 한켠이 곧 돌덩이가 된다.
건강하고야 말겠다는 다소 결연한 자세
한국에서는 챙기지 않던 영양제를 여러 개 사서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며 건강을 챙기는 사람이 됐다.
비단 병원이 멀어져서 만은 아니다.
외국어로 내 몸이 느끼는 증상을 설명하고, 진단을 설명받고, 의료 서비스에 필요한 일련의 행정적인 절차를 거치는 일 역시 그리 명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다.
우리 중 누군가 몸이 좀 안 좋아지는 때가 가끔 찾아오면, 우리는 다소 결연해 진다.
아프면 이 나라에서 쌓아온 몇 년간의 생활이 무너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원동력이 되주어서 말이다.
금전적이거나 유형의 물질보다는, 이 곳에 맞춰 살아온 우리의 일상 속 흐름, 마음가짐 등의 보이지 않지만 공들여 쌓아 온 마음의 탑.
공든 탑이 자칫하다간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을까?
쉬이 무너지진 않겠지만, 아프게 되면 다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우리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는 회의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어디에 살든 건강은 세계 만국에서 중요한 가치이지만, 이 나라에서 사는 동안은 더더욱 그렇다.
어떻게든 건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