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마의자를 지나면 허리까지 올라오는 아일랜드 테이블이 서있다. 물론 와인이 들어있는 냉장고도 감각적인 연한 오렌지색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티브이에서 봤던 와인 잔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손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와인 잔이 얇게 반짝거렸다. 나는 냉장고에서 와인 하나를 꺼내 와인 잔에 쫄쫄쫄 따랐다.
“여보, 그거 마시면 돈 내야 해”
“아, 내면 되지! 잊었어? 우리 로또 2등이야!”
나는 눈을 부라리며 큰소리쳤다가 로또 2등이란 말은 왠지 누가 들을까 조심스럽게 소곤거렸다.
테이블 위에 세팅되어있는 낱개 포장의 쿠키로 입가심을 하며 나는 넓디넓은 소파에 양팔을 한껏 걸치고 온몸을 눕듯이 파묻었다. 티브이 볼륨을 이빠이 크게 올려 봐도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마누라는 욕실에서 거품 나는 입욕제를 들이붓고 탕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마누라를 기다리다 홀짝홀짝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 난생처음 보는 더없이 하얗고 푹신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하얀 침대시트에서는 시원한 냄새가 났다.
아침은 조식 뷔페에서 해결하였다. 매일 청국장이나 끓여대던 마누라가 따뜻하게 구운 블루베리 베이글과 크림치즈, 베이컨과 로메인 샐러드, 양송이 수프를 담아왔다. 나도 양껏 우거지 소고기 국밥과 석박지를 수북이 담아와 우적우적 씹었다. 마누라는 꽤 우아한 포크질을 하며 호텔 조식을 즐기는 듯했다. 마누라의 눈 밑 기미가 베이컨을 씹을 때마다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흐뭇해서 심장이 간질간질해졌다.
달달한 모닝 아메리카노까지 마시고 우리는 2층 수영장 물에 몸을 담갔다. 수영장물이 웬일인지 부드러운 온천수처럼 온몸을 따듯하게 감싸주었다. 돌고래처럼 탄탄한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어느 젊은 놈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걸어 나왔다. 거길 이용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뒤태가 끝내주게 좋아 보였다. 양쪽 엉덩이가 오리 궁뎅이처럼 볼록 튀어나온 젊은 놈은 수영장 물 온도를 발로 체크하곤 곧장 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양손을 모아 물총을 만들어 찍찍 쏘아대며 돌고래 여자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돌고래 여자는 멋지게 포물선을 그리며 물속으로 다이빙해 뛰어들었다. 그들은 수영도 돌고래처럼 아주 잘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얼굴만 동동 물 위로 내민 채 넋을 놓고 구경하였다. 돈이 많으려면 수영은 기본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소심하게 양손을 펼쳐 수영하는 척을 해본다. 하지만 손으로 아무리 물을 헤엄쳐보아도 물속 깊이 딛고 있는 두 발은 좀처럼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 녀석들은 언제부터 부자였을까? 부자가 된 다음에 수영을 잘하게 된 걸까, 수영을 잘한 다음에 부자가 된 걸까?’
돈이 많아지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다 생각했지만 나는 저 녀석의 수영도 부러웠고, 오리궁뎅이도 부러웠고, 돌고래 아가씨도 부러웠다. 마누라는 자꾸 수영장물속에서 자기 팔뚝의 때를 미는 것 같았다.
낮에는 구청 팀장한테 전화해서 환경감시단을 그만둔다고 통보했다. 수화기 안쪽에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큰일이네요.' 했고, 나는 그러든지 말든지, 더 이상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이유 없이 웃음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더군다나 제일 통쾌한 건 같은 팀으로 다니던 반장 놈의 쉐끼에게 한방 먹인 것이다. 늘 나보다 1~2년 경력이 높다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고 잘난 척을 하는 통에 그동안 진짜 아니꼽던 참이었다. 내가 관뒀으니 ‘선생님 대신 구청 신입 공무원과 한 팀으로 내보내야겠네요.’라고 팀장은 대안을 내어놓았다. 낄낄.
그리고 우리는 중고자동차매장에 가서 2020년 2월에 출시된 그랜저 프리미엄급을 4천만 원에 샀다. 새 차나 다름없는 중고차라며 자동차 딜러가 침을 튀기며 생색을 냈다. 내 생에 가장 스케일이 큰 쇼핑이었다. 마누라는 하루 종일 마사지 샵과 피부과에서 사는 듯했다.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룸으로 돌아왔는데 내가 못 알아봤는지도 모르겠다. ㅎ
-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