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풍차 돌리는 날 11
그치, 아직 내 행운은 남았을 거야
by injury time Aug 20. 2021
마누라는 검사를 위해 이틀째 금식이다. 북엇국을 마지막으로 식사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마누라의 냉동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린 후 컵라면에 말아먹었다.
주치의는 마누라의 상태가 안 좋다고 했다. 전신에 염증이 퍼져 폐와 심장, 신장까지 손상됐다고 했다. 항생제를 계속 투여하지만 좀처럼 염증 수치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에 한 번씩은 쇼크가 와서 간호사와 나를 놀라게 했다. 열이 40도까지 올라가 여러 번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가곤 했다.
“나 설렁탕 먹고 싶어. 입술이 끈적끈적 달라붙을 만큼 진하게 끓인 설렁탕.”
마누라가 이틀째 굶으며 누워만 있다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설렁탕이 먹고 싶다니. 게다가 입술이 끈적끈적 달라붙을 만큼 진하게 끓인 설렁탕이라니,, 당장 머리를 굴려 봐도 그렇게 진한 설렁탕집이 병원 근처에 있나 싶었다. 내일 새벽에 검사를 하고 나면 점심때는 밥을 먹을 수 있다니 미리 입맛 도는 것으로 준비해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시 세끼를 컵라면만 먹었더니 마누라의 설렁탕 얘기에 나도 어느새 침이 고였다.
“찾아보고 올게. 기다려봐.”
나는 병원 밖 산책로 흡연실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설렁탕 맛 집을 검색했다. 도무지 진한 설렁탕을 어디서 파는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괜스레 맛 집 블로그만 뒤지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구름이 잔뜩 끼었는지 오래되어 상한 막걸리처럼 탁한 하늘이 묵직하게 내 머리 위에 가득 찼다.
이런 하늘을 본 적이 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무 일 없이 세상이 잘만 돌아가는데 나 인생만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움직였던 날, 그날따라 학교에서 중간고사를 잘 봤었다. 평소에 공부도 하지 않고 놀고먹다가 대부분 문제를 느낌적인 느낌으로 대충 찍었었는데 의외로 점수가 꽤 잘 나왔었다. 기분 좋게 성적표를 품에 넣고 집으로 걸어오는데 동네 점방 아줌마가 아버지가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셨다고 했다. 그날 하늘이 저렇게 하얀 물감에 먹물 뿌려놓은 것처럼 묵직하게 내 머리 위로 탁하게 쏟아졌다. 아버지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남편 잃은 여자어른과 아비 잃은 나는 세상에 버려졌다.
“김화란 님 보호자시죠? 얼른 병실로 와주세요.”
탁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마누라가 또 쇼크가 왔나 보다. 담배를 비벼 끄고 급하게 병실로 갔으나 마누라는 없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고 했다.
이제 나는 갈 데가 없다. 하루 한번 면회가 가능했다. 마누라가 있었던 병실에는 다른 환자가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마누라의 짐들을 정리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막상 병원을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탁한 하늘은 보란 듯이 장대비를 쏟아냈고 나는 그 비를 겨우 작은 두 개의 손등으로 막으며 신호등 앞에 서있다.
그때 횡단보도 건너편에 웬일인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큼지막한 현수막이 나풀거렸다.
로또 명당, 1등만 5번
나는 끌리듯 횡단보도를 건너 그곳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3등, 다음은 2등, 이번에는 진짜 1등이다! 나는 잊고 있던 행운의 번호를 정성껏 색칠했다. 슬로비디오처럼 나는 천천히 지갑에 있는 만 원짜리 일곱 개를 꺼내 홀린 듯 지불하고 복권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그새 더 낡아진 프리미엄급 그랜저의 시동을 켰다.
그리고 뒷좌석 주머니에 넣어둔 전국 로또 명당 지도를 꺼내 펼쳤다. 차창 앞 유리가 안 보일 정도로 지도가 크게 촤라락 펼쳐졌다.
‘그치, 아직 내 행운은 남았을 거야!’
나는 흐르는 단 침을 닦으며 엑셀을 밟아 힘껏 출발을 했다. 브레이크 패드가 나갔다는 생각은 저 멀리 까치밥으로 던져버리고.
소설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서 주인공이 죽고 난 후를 서사하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에필로그를 담았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엔딩 크레딧 올라올 때, 쿠키영상, 그때의 상황입니다.
주인공의 아내, 김화란은 다행히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을 했고, 전국 로또 명당을 찾아 떠났던 남편은 결국 브레이크 고장으로 교통사고를 내어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연락을 받은 아내 김화란은 울며불며 달려가고, 경찰은 죽은 남편 시신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지갑을 소지품과 함께 부인에게 건넵니다. 지갑에는 남편이 병원 앞에서 샀던 로또가 꼬깃꼬깃 있었고 그중 한 장이 결국 1등으로 당첨되었다고 합니다.
김화란은 그 1등 당첨금으로 '참 진한 설렁탕집'을 오픈하고 대박이 났으며, 멋지고 착실한 남자를 다시 만나 밤마다 풍차 돌리며 잘 살았다는 후일담입니다~
-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