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우리는 그렇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얼마 후 같이 살았으며, 얼마 후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지독히 싸웠던 것 같다.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싸움은 대부분 그가 사과하는 것에서 끝이 났다. 저녁식사를 준비해 놨는데 그가 연락이 안돼 음식이 식어버렸다던지,
화장실에 있어야 할 물건이 식탁 위에 있는다던지,
장 봐온 채소가 그대로 거실에 놓여 있다던지,
성을 빼고 이름만 부르는 동료 여직원의 sns 연락에도,
명절날 본가에서 늦게 오는 그를 기다리는 일도,
뭐 대충 이런 사소한 불만들을 나는 그에게 지독히 못된 말로 몰아세웠었다.
그래서 우리는 헤어졌다. 도저히 복구가 안 되는 무수히 많은 말들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헤어진지 1시간.
눈보라치는 벌판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눈보라는 멈췄고 눈은 눈 앞에 잔뜩 쌓였다. 걸어서 나올 힘도 없다. 우선 쉬어야겠다. 우선 시원섭섭하다. 다 잘됐다. 소파 등받이나 의지하며 자야겠다.
헤어진 지 12시간.
자고 일어났더니 그가 떠난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집어던진 쿠션에, 휴대폰 충전기에, 낡은 옷가지에, 냉장고에 붙여있다가 뜯긴 스냅사진들까지, 내 집은 엉망이었다.
허탈했다. 그렇게 많은 얘길, 오랜 시간 싸웠지만 아직도 그에게 해야할 말이 남아있다는 게 어이없고 억울했다.
왜 그때 넌 전화를 안 받았어. 너네 부모님이었으면 받았을 거잖아!
왜 그때 넌 나를 붙잡지 않았어. 네가 아직도 잘했다는 거야!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잖아. 사과하지 마!
너랑 지금까지는 시간 낭비였어!
이 말은 안 한게 다행이다. 만약 이 말까지 했다면 나는 죄책감에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분명 후회하고 있었다. 나는.
헤어진 지 일주일.
아직 눈을 감으면 그가 생각난다. 아니 눈만 뜨면 생각이 난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의 냄새가 난다. 그가 놓고 간 게 있나 아무리 살펴봐도 없는데 아직도 그 냄새가 내 집 어딘가에서 폴폴 나오는 것 같다.
혼자 밥을 먹을 때면 당연히 생각이 나고,
빨래 건조대에 그의 옷은 없고 내 낡은 속옷만 봐도 생각나고,
나란히 앉아 책을 읽던 소파 옆에는 이제 어떤 책도 놓여있지 않다.
늘 정리정돈 잘하던 그의 손길이 닿아있는 현관은 이제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슬리퍼에 구두에 운동화로 늘어져있다. 모두 내 것들이다.
하루 종일 곰곰이 생각해봐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든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는 떠났다.
헤어진 지 한 달.
클럽에 가자는 것도 거절하고 번번이 휴일에 집에만 있는 나에게 절친이 '브런치'에 가입해서 글이나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문예창작학과를 나왔으나 손을 놓은 지 오래된 나는 생계형 직장인이었다. 지금은 은행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 고객과의 응대는 정규직이 하고, 나는 그 정규직이 물어다 준 서류를 입력하거나 대출 만기 고객들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간단한 연기 신청 접수 같은 것을 했다.
먹고살다 보니 내가 문창과 출신이라는 것도 잊었다. 그나마 왕년에 잘 나가던 애가 은행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는 말이 과 동기들에게 돌까 봐 나는 가까운 친구 한 명에게만 내가 은행 계약직인 것을 실토했었다.
친구의 제의에 브런치가 대체 뭐하는 곳인지 들어가 보았다. 세련된 사진들과 감각적인 글의 제목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몇 개 클릭해서 읽어보니 가벼운 오글거리는 이야기들이다.
충분히 나도 쓸 수 있는 글들이어서 욕심이 났다. 그리고 그날로 작가 지원을 시작했다. 오래된 파일에서 글을 몇 개 꺼내 수정을 하고 자기소개를 작성하고 기획안을 만들어 신청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졸업 후 5년 만에 글을 쓰니 모든 게 글감이었다. 나는 두 달 만에 50편의 글을 올렸고 꽤 인정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친구는 처음에 브런치를 소개해준 친구 단 한 명,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구독자가 금세 200명을 넘었다. 퇴근 후에는 대부분 글을 쓰며 보냈고 그도 점점 사라지는 듯 잊혔다.
그러던 어느 날, 근무 중에 알람이 하나 왔다. 브런치다. 전화기는 켜있지만 벨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연락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브런치 알람이 그나마 나를 자주 찾았다.
누군가 구독을 했다. 아직 작가는 아닌지 구독자의 프로필은 노란 동그라미다. 늘 그렇듯이 구독자도 나와 브런치팀이 다다. 그냥 흘러 흘러 내 글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고 그냥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프로필명이 나를 잡아끌었다.
'칭찬 고마워'
꽤 독특한 프로필명이다. 뭔가 시크하면서 귀여움이 뚝뚝 묻어나는, 노란 동그라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쌜쭉 하고 올라갔다. 오랜만에 웃는 듯했다.
'칭찬 고마워'는 자주 내 브런치에 들어와서 라이킷을 하고 갔고, 언젠가부터는 내가 발행한 첫 글부터 꼼꼼히 읽는 듯 했다. 하루에 한 개씩, 낮 12시에서 1시 사이에 어김없이 '칭찬 고마워'는 내 글을 차례차례 읽고 갔고, 신호라도 보내듯 라이킷을 누르고 사라졌다.
-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