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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 해룡면 풍기리에 바람이 불면<3부>

13. <드디어 막편>

by injury time

서른대여섯밖에 되지 않은 안순네는 고생, 고생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는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뵈는 모습으로 허리에는 늘 전대를 차고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거나 부둣가에서 한물간 물괴기를 받아다가 읍내로 가져가 싸게 내다 팔곤 했다. 한량 같은 철룡 대신 부지런한 안순네가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은 꽤 되었나 보다. 상식의 마을금고에 와서 안순네는 오늘, 대출을 알아보고 있다.

풍기리에 아직 편의점 하나 없었기에 북카페 옆에 큰맘 먹고 개인 편의점을 운영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3톤짜리 낡은 어선으로 백조기 잡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매번 날씨에 따라 어획량이 달라지는 불안정한 뱃일에 신물이 난 그녀는 남편과 돌아가며 편의점을 운영하고 비수기에 뱃일을 나가자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

안순네는 그동안 모은 돈에 5천을 대출받아 북카페 옆에 편의점 CU를 열기로 했다. 개인 편의점은 내가 열고 싶을 때 열고, 닫고 싶을 때 닫을 수 있다. 물건만 납품받는 방식이다. 잘 되려나 모르겠다. 평생 갯일만 하던 그들은 그렇게 편의점 개업이라는 우아한 꿈을 꾸며 심장에 빵빵한 바람이 들어갔다.

고갈비집 은옥은 영 예전 같지 않다. 상식이 매번 퇴근하고 고갈비집에 들러 고갈비 정식을 먹지만 이제 옆 자리는 늘 비었고, 그 대신 자주 철룡이가 상식 앞에 앉아 처인성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홀짝거린다.

그래도 여사장이 가끔 던지는 농담에 부푼 마음을 막걸리로 달래곤 했다. 웃긴 건, 얄밉게도 은옥은 편의점 사장이 된다는 철룡에게 예전과 다르게 살가워졌다는 것이다.

"철룡 씨는 무슨 팔뚝이 그렇게 두꺼워요? 뱃일을 해서 그런가. 호호"

하면 철룡은 왜 그런지 번번이 입가에 침이 고인다.

"남자나 여자나 겉모습 보다 마음속 진심이 중요하지! 저 깊은 곳에 누가 들어앉아있나 잘 찾아봐. 멸치회 초무침 나왔습니다."

주방이모가 파릇한 미나리가 싱싱한 멸치회와 버무려진 멸치회 초무침 한 접시를 가져다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몇 마디 거들고 나섰다. 사실 주방이모는 서울에서 은옥이 아는 사람의 건너, 건너 소개받은 분이다. 객지에서 일하는 중년 여자들의 사연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한때 잘 나가던 시절을 지나 남편의 사업실패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남의집살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방이모는 일식이나 태국식, 프랑스 요리도 곧잘 만들어서 은옥에게 맛보여 줄 정도로 요리 솜씨가 좋았다. 게다가 주방이모는 매사에 좀 툴툴거리고 쌀쌀맞았지만 아는 것도 많았고, 빈 시간에는 늘 안경을 코끝에 매단 채 핸드폰으로 시를 읽는 고상한 취미가 있었다.

"주방이모가 뭘 좀 아시네. 암만, 얼굴 뜯어먹고 사나. 몽크만 맞으면 되지. 허허."

철룡은 막걸리가 들어가니 농도 짓은 헛소리를 하며 혼자 얼굴이 벌게졌다.

풍기리 태양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자경은 푸른색 롱코트를 입고 골목길을 서둘러 내려왔다. 청록색 커튼으로 만든 스칼렛 오하라의 A라인 드레스처럼 롱코트의 허리끈을 있는 대로 꽉 동여매고 자경은 오늘도 풍선을 달고 가볍게 북카페로 향했다. 얼마 전 문자메시지를 받은 후로 자경은 그 핸드폰 액정을 쓰다듬으며 웃음이 나는 걸 참아냈다. 오늘은 벌써 무슨 책을 읽을지 생각해 놨다. 저번에 책꽂이에서 봤던 <걸어서 세계 속으로- 터키 편>이다. 영순이 사회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미리 읽고 시인과 나눌 이야기를 상상했다.

북카페에 다다랐을 때 <파우스트>는 어쩐 일인지 간판 불이 꺼지고 카페 안도 블라인드가 내려진 채 어둡고 조용했다. 자경은 부푼 마음을 다시 구겨 넣으며 송시인이 어디로 갔는지 카페 안을 두리번거렸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인기척도 없었다. 한 십여 분이나 서성거렸을까. 멀리 등대 불빛이 카페 안까지 잠깐 스며들었다. 그때 창문 틈 사이로 그게 보였다. 테이블 위에 앉아있는 길쭉하게 반짝, 윤기 나는 종아리를. 이윽고 여자의 하얀 허벅지 사이로 기어들어가는 갈비뼈가 드러난 야윈 송시인의 뒷모습까지.

어두운 그림자들이 서로 뒤엉켜 날뛰는 그들을 훔쳐보며 자경은 목구멍에 호두만 한 이물감이 턱 하고 막고 있는 듯 숨을 쉴 수 없고, 알 수 없는 구역질이 나왔다.

어둠 속 여자 발목의 사과그림을 보며 자경은 붉은 입술을 손등으로 지웠다. 심장에서부터 솟구치는 눈물이 차갑게 볼을 따라 흘렀다. 자경은 굳어가는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다가 갈매기들이 후루룩 날아가자 눈을 찔끔 감고 다짐하듯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얼마나 발걸음이 무겁던지 발을 떼고 다음 발을 떼는데 영겁의 시간처럼 느리기만 했다. 등대 불빛이 자경을 눈치 없이 따라왔다. 눈물을 훔치며 어이없이 설레었던 시간들을 생각했다. 눈물이 나면서도 웃고 있는 개떡 같은 자신을 비웃으며 자경은 세상 다정하기만 했던 시인의 메시지를 삭제했다.

해안가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는데 멀리서 상식이 마을버스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여보."

자경이 달려가 상식에게 안긴다. 실연당하고 집에 가다 아빠를 만난 사춘기 소녀처럼 서러움이 머리꼭지까지 차올랐다. 상식은 아내의 서러운 목소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게 오래된 부부의 문제라면 문제랄까. 상식은 아내에게 자신의 목덜미를 나무토막처럼 무덤덤하게 내어준다.

"술 한 잔 하고, 차는 사무실에 놓고 왔네"

얇은 바바리코트 하나 걸치고 있던 상식은 날이 추운지, 연신 코를 훌쩍거리며 빨개지도록 손수건으로 닦아댔다.

"옷 좀 뚜꺼운 거 입고 다니재. 이라고 다니면 춥재"

자경은 남편의 차갑게 언 손을 잡아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쏙 잡아넣었다. 상식의 거친 손끝을 쓰다듬으며 자경은 뜨거운 침을 꾹꾹 삼켰다. 눈물이 눈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닌가 보다. 자꾸만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들이 꾸역꾸역 넘쳐 나오려고 했다. 아내의 꾹꾹 삼키는 눈물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상식은 불 꺼진 오늘의 고갈비집을 생각하며 아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내의 경직된 어깨에 손을 대는 순간, 상식은 알 수 없는 찌리함을 느꼈다.

"뭐여? 무슨 일 있었어? 요새 북카페 갔다 오면 매번 그라네. 왜? 누가 시비 걸어? 힘들면 다니지 말어."

상식은 품에 안긴 아내를 내려다보며 소주와 담배냄새 배인 퀴퀴한 입김을 솟아냈다. 자경은 남편의 쉴 새 없이 떠드는 잔소리가 어쩐지 싫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같은 편일 것 같다는 생각에 구겨졌던 심장의 주름이 서서히 펴져갔다. 오늘따라 곱게 화장한 아내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반짝이는 게 새삼스레 넙데데한 얼굴이 얼마나 예쁘게 보이던지. 상식은 아내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말없이 걷는 동안 벌써 페인트가 너덜너덜한 대문을 지나 그들의 따듯한 마당으로 들어섰다. 달빛이 마당을 가득 비추고 있었다. 방울이가 먼저 알고 달려와 상식의 바짓가랑이를 맴돌았고, 티브이 보던 영순이가 방에서 뛰어나왔다.

"아부지, 아이스크림 사 왔어?"

"아차차차. 아부지가 깜박 잊었구먼. 내 후딱 갔다 올 거고만. 기다리소. 내 강아지."

상식은 딸내미 양 볼을 납작하게 찌부시키고 동그랗고 귀여운 콧방울을 앙- 깨문다. 그날 밤 영순네 가족은 달콤하고 끈적한 아이스크림 파티를 하다가 늦게, 늦게 잠이 들었다. 신나서 달뜬 딸내미를 겨우 재우고서야 상식과 자경은 오랜만에 뜨겁게 몽크를 했다.

오늘도 고갈비 집에는 손님이 한 명 앉아있다. 철룡이다. 철룡은 아내가 애끼고 애껴 모은 돈으로 편의점을 차린다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바쁜데 속창아리 없이 아직도 은옥의 고갈비집만 쫓아다녔다. 이제는 은옥의 손목이나 잡았나 모르겠다. 은옥만 보면 침이 나오는 철룡의 그 툭 튀어나온 입술이 문제였을까. 아직도 은옥은 철룡에게 유리알처럼 차갑게만 반짝인다. 그래도 이제는 은옥이 철룡과 마주 앉아 고갈비에 젓가락을 꾹꾹 눌러주니 친해졌다고 해야 하나. 고갈비를 젓가락으로 꾹꾹 눌렀다가 쪽 빨아먹는 은옥의 입술을 보면 그때마다 철룡은 사타구니가 간질간질 뜨거워진다.

두 병 째 막걸리 병의 바닥이 보일랑 말랑했다. 고갈비가 식어 꾸덕해지며 나른한 공기가 흐를 때쯤, 은옥이 턱을 괴고 노가리 살을 뜯으며 주방이모를 바라본다.

"이모, 형부는 어떤 분이셨어요?"

주방에 서서 콩나물 대가리를 따다 말고 주방이모는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성규 아빠, 말도 마. 사업하는 것마다 말아먹고 몇 년 전에 시아버지가 남긴 코딱지만 한 땅까지 팔아먹고 어디로 도망갔는지 마누라, 자식새끼 다 놔두고 사라졌으니."

주방이모는 행주에 손을 쓱쓱 닦고 촉촉한 눈으로 핸드폰 배경화면에 저장되어 있는 가족사진을 들여다본다. 단아하게 스커트를 입고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있는 주방이모 옆에 은발 곱슬머리를 한 남자가 고른 치아 일곱 개를 보이며 웃고 있다. 눈가 주름이 참 매력적이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건장한 아들이 서있어 참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해 보인다. 이모는 가족들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곱게 쓰다듬고 깊은 한숨과 함께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어버렸다.

그리고 주방이모는 아들 자랑이 늘어진다. 아들이 열기구 조종사라며 지금은 터키 하늘을 날고 있을 거라고 했다. 열기구 여행 중에 강원도 양배추 밭에 떨어져 양배추 밭주인의 도움으로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고, 바람 따라 돌고 돌아 지금은 터키 하늘을 날고 있다고 했다. 애비나 아들이나 지 좋아하는 꿈만 좇아 살고 있다며 사라진 남편을 그리워했다.

풍기리 앞바다처럼 풍기리 사람들은 그렇게 자주 바람 따라 저 멀리 갔다가도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돌아올 곳은 언제나 꽃게와 갯가재와 동죽과 백합과 낙지와 소라가 넘쳐나는 달큰한 갯벌. 언제나 풍기리는 안온하게 그들을 기다렸다.

"허허. 뭐 큰돈 벌어 나타나시겠죠. 뭐."

막잔을 따라 마시고 철룡은 따뜻한 낡은 담요 속 갯냄새 진한 안순네에게로 서둘러 달려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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