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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 해룡면 풍기리에 바람이 불면<3부>

11. 송시인과 살찐 전도연

by injury time

북카페는 의외로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해안가에 이렇다 할 찻집이 없었기도 하지만, 관광객들이 한두 명씩 드나들더니 어느덧 송시인이 만들어주는 녹차라떼와 쌍화차를 마시며 노닥거리는 사람들이 늘었다. 특히 얼마 전부터 영순 엄마는 <파우스트>의 단골손님이 되어 자주 시인을 만나러 갔다.

앞머리와 양쪽 옆머리, 뒤통수에 분홍색 헤어롤을 매단 채 영순 엄마는 밤 화장을 한다. 상식은 거의 매일 고갈비집에서 저녁을 때우고 아홉 시가 넘어야 오니 최대한 일찍 딸내미에게 저녁을 해먹이고 <파우스트>에 간다. 영순 엄마는 요즘 생전 읽지도 않은 소설을 읽느라 여념이 없다.

마을에서 그나마 고상해 뵈는 그녀가 넙데데한 얼굴에 파우더쿠션을 톡톡 두드리면 마술처럼 얼굴이 샤방샤방해진다. 그리고 헤어롤을 풀고 한껏 뿌리 볼륨을 살려 손가락 빗질을 하면 금세 탤런트 김남주처럼 우아해진다. 퍼프소매의 코르덴 고동색 원피스에 그녀가 손수 뜨개질한 방울 달린 카디건을 걸치고 나풀나풀 <파우스트>로 날아가면 카페 위를 날던 갈매기들이 가로등 위에 옹기종기 앉아 그녀를 지켜보곤 했다.

사실 며칠 전, 영순 엄마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영순 엄마가 딸내미와 해안가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멀리서 북카페 주인 송시인이 문 앞에 서서 여느 때처럼 데님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다가 영순 엄마를 멀리서 보고는 한 손을 번쩍 들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때의 송시인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얼마나 반갑게 손을 흔드는지 시인의 단단하게 서있던 두 다리도 같이 흔들릴 정도였다. 아마 근래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격하게 반가운 인사였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송시인은 영순 엄마에게 이름을 물어봤고, 영순 엄마는 원래의 이름인 자경이 되어 시인에게 불렸다.

자경을 설명하자면, 평상시에 전혀 꾸미지 않을 땐 넙데데한 평범한 얼굴에 곱슬기 있는 앞머리가 좀 귀엽게도 보이지만, 그게 또 조금만 꾸미면 화려해지는. 쉐도우로 얼굴 전체를 돌려깎기 하듯 터치하면 신기하게도 조막만 한 얼굴이 되고, 무쌍이지만 제법 또렷한 눈매, 반듯하고 훤한 이마에 웃을 때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가는 특징이 있다. 오똑한 코끝에 교태로운 점 하나가 콕 박혀 있고, 손목 발목이 몸에 비에 생각보다 얇은 스타일로 촌에 살지만 고상하고, 나름 섹시한 면모를 보이는, 풍기리의 크고 살찐 전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오셨네요. 자경씨."

자경은 구운 달걀 다섯 개를 품 안에서 꺼내 시인에게 건네주었다.

"전기밥솥에 쪄봤는데 맛있을랑가 몰르겠네요. 호호"

카운터 테이블에 달걀을 내려놓고 책꽂이로 달려가 오늘 읽을 책을 찾느라 고생이다. 짧고 쉽고, 거기다가 재미있는 책을 골라야 한다. 읽은 후엔 꼭 시인이 와서 어땠는지 물어보니 대충 읽을 수도 없다. 책을 책꽂이에서 빼 후루룩 펼쳐보다 다시 꽂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그녀의 귓가가 뜨거웠다. 시인이 가까이 다가와 자경이 들추는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이 책 자경씨가 읽으면 좋을 것 같네요."

시인은 주인공 뫼르소가 자기를 닮은 거 같다며 <이방인>을 꺼내 자경에게 건네주었다. 건네주는 손끝에 서로의 손끝이 닿을락 말락 했다. 아니 닿은 것도 같다. 손끝이 뜨겁게 뜨거운 걸 보면. 자경은 어지러워 쓰러지기 직전이다. 몽롱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자경은 카운터 앞에 앉아 무릎담요를 펼쳐 테이블 위에 도톰하게 깔고 그 위에 팔꿈치를 올려 책을 펼친다. 마치 아무 일 없듯이 그렇게 우아한 북카페의 자경이 되어 오렌지 불빛 아래 스며든다.

"오늘은 자몽차 한잔 드셔 보세요. 자몽이 여성들 몸에 좋다네요."

송시인은 자경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송시인의 자글한 눈가 주름이 마치 풍기리 갯벌처럼 무수히 많은 사연이 골골마다 숨겨있을 것만 같다. 자경은 경직되는 어깨를 들킬까 봐 자세를 이리저리 고쳐 앉으며 자몽차를 주문했다.

실업계고등학교를 나와 스무 살 때부터 경리를 봐왔던 자경은 첫 직장의 부장님 소개로 가난한 대학생 상식을 알게 되었고, 대학생 오빠한테 훅 빠져 혼전임신으로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자경에게 상식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아니 지금까지는 마지막 사랑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심장을 간질이듯 마주 보고 앉은 시인의 은은한 날숨 냄새에 자경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심장도 코끝까지 딸려 올라간다.

북카페는 쌉싸름하고 달콤한 자몽향이 가득해지고 이제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지 창문마다 뿌옇게 물안개가 꼈다. 밤이 깊어질 때쯤, 하얗게 낀 물안개를 흐트러뜨리며 카페 문이 열리고 소란스럽다.

"송사장님. 날이 꽤 쌀쌀해졌어요."

은옥이다. 은옥은 들어오자마자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며 호들갑이다. 자경과 은옥은 아직 서로를 모른다. 춥다면서 들어오자마자 스카프를 풀어 목선을 훤히 들어내 놓는 은옥이가 자경은 참 마땅찮다.

"손님이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읍내에서 음식점 하는 이은옥이라고 해요. 아, 음식은 잘 못해요. 헤헤."

은옥은 붙임성도 좋게 자경에게 자기소개를 하며 자경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옥이 와일드한 가죽재킷을 벗으니 단정한 화이트 셔츠가 왠지 자경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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