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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Aug 28. 2023

키스 마크

#2

독서실에서 자고 아침에 들어온 날이면 아들은 아침도 거른 채 이불속으로 들어가서는 오후가 돼서야 푸석푸석한 모습으로 나오곤 했다.


"너 독서실에서 어떻게 자는 거야?"

"책상 밑에 다리 뻗고, 민수가 빌려준 쿠션 고 담요 덮고 자는데?"

"어이구, 그래서 제대로 자겠냐? 앞으로는 엄마가 매번 새벽 1시에 데리러 갈 테니 1시까지만 공부해. 집에서 푹 자고 일어나서 공부해야지."


초저녁부터 겨울비가 내려 거리가 온통 축축했다.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집안일을 하던 자경은 열두 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낡은 롱코트를 입고 밖을 나선다. 올 한 해는 아들을 위해 적어도 독서실 픽업은 손수 하고 싶다던 자경은 화장기 지운 말간 얼굴로 차를 몰고 아들의 스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워낙 번화가인 스카는 낮시간동안은 주정차가 쉽지 않았지만 자정이 넘으니 편의점 불빛만 오롯이 골목을 밝혔다. 독서실 앞에 차를 세우고 집에서부터 준비해 온 따듯한 모과차를 홀짝였다.

모과의 쫄깃한 과육을 씹고 있는데 저 멀리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고동색 코르덴 슈트에 흐느적거리는 맘보바지를 입은 자경의 아들 현민이 편의점 뒤편 골목에서 나와 독서실로 서둘러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 녀석이 왜 이 시간에 공부 안 하고 돌아다니지?'

자경은 무거운 마음으로 모르는 척 아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


얼마 후 아들은 공부에 찌든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너 어디 갔다 와?"

"배고파서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먹었어."

어울리지 않은 코르덴 슈트로 한껏 멋을 낸 아들의 모습은 자경을 불길하게 만들었지만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고 조용히 집으로 향했다.

"앞으로는 편하게 입고 다녀라."

아들은 묵묵부답이다.    



집집마다 숨은 우환이 하나씩은 있는 법이다. 자경의 집은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이 늘 걱정거리였다. 직장을 관두고 시골에 내려가 부모님 봉양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나이 든 두 양반을 도시로 모시자니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우선 부모님이 서로 각방을 오래 쓰신 터라 각자 방 하나씩은 차지하고 생활하셔야 하니 어려운 형편에 그 비위를 다 맞추기는 힘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자경의 나이 든 부모님은 늘 살던 터전을 버리고 낯선 도시 생활을 흔쾌히 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다. 대신 자주자주 찾아뵙자는 자식들의 염려에 주말이면 다섯 형제들끼리 돌아가며 부지런히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그날도 아이들만 두고 자경의 두 내외가 1박 2일 동안 집을 비운 날이었다.


엄마, 아빠가 없는 집은 아들들 천국이다. 온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중2 작은 아들은 부모님이 없는 동안, 하루종일 거실 소파 밑에 꼬질꼬질한 이불을 펴고 자리를 잡았다. 티브이로는 게임 유튜브를 켜놓고, 한 손으로는 연신 폰을 열어 게임을 한다.

"형, 나 신라면 하나만."

변성기가 온 동생이 가래 끓는 목소리로 독서실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서야 들어온 형에게 말했다. 걸어오며 허물 벗듯 바지와 윗옷을 차례차례 벗어놓은 현민이 식탁 위 라면봉지 하나를 무심히 동생에게 던진다. 붉은색 라면 봉지가 날아와 동생 손에 착 잡혔다.

"나이스 케치!"

턱을 괴고 모로 누운 동생은 한 손으로 그걸 용케 잡아채더니 그 라면봉지를 주먹으로 한번, 또 손바닥으로 여러 번 구깃구깃 주물러 터트린다. 바스락바스락 맛있는 소리가 났다. 수술대에 누운 환자처럼 그걸 가운데 반으로 뜯어 개봉했다. 동생은 하얀 부스러기들에 빨간 수프양념을 솔솔 뿌리며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주문을 외웠다.

생라면은 매워야 제맛이지. 동생의 입주둥이가 벌겋게 될 때쯤 형 현민이 고추를 덜렁거리며 머리에 물기를 털고 나왔다.

"야, 나도 한 입 먹자."

"아잉, 형도 하나 뜯어먹어."

동생이 움켜쥐며 그걸 이불속으로 숨겼다. 그러는 통에 라면 부스러기들이 이불 여기저기 흩어져 날렸다.

"짜식"

현민은 동생의 머리를 한번 쥐어박았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안방으로 들어가 머리를 말렸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그런 날은 징그러운 사춘기 아들들에게 유토피아였다.

형 현민이 머리에 한껏 힘을 주고 거실을 나올 때였다. 언뜻 형의 가슴에 난 낯선 상처가 눈에 띄었다.

"형, 가슴에 그거 뭐야? 왜 빨갛게 멍들었어?"

"자식, 애들은 몰라도 되는 거야! 히히"

현민의 새빨간 키스마크는 그렇게 며칠을 현민의 쇄골 밑에 새겨져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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