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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Jun 24. 2024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두렵다.

최고의 선택, 뒤돌아보지 않는 능력

모두 자기만의 합리가 있다. 각자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나 혹은 자기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들. 하물며 오늘 점심은 어디서 몇 시에 먹을까같은 하찮은 선택도 나름의 합리가 존재한다. 그 합리에 있어 간혹 불리한 위치에 처할 우려가 있을 때 이 합리는 약해진다.


최근 미국 인턴프로그램의 설명회에 초청받아 짧은 발표를 했다. 그중 26살의 한 학생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이 프로그램에 합격한 상태고 부모님에도 허락을 받았단다. 근데 한 가지 두려운 것이 지금 나이가 26살이고, 친구들은 다 취업해서 돈을 벌고 있고 지금 이 미국경험이 내 인생에서 도움이 될까를 걱정하고 있었다. 질문의 요지는 이직을 할 때 미국인턴이 도움이 되는지와, 내가 갔던 기수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 몇 살이었냐는 질문이었다. 6년이 지났음에도 미국 프로그램 관련 내게 질문했던 수많은 이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사실 이 구태의연한 질문들을 듣고 있으면 시간이 지나 교육과정이 바뀌고, 일자리나 외적인 변수가 바뀌어도 예비지원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내가 가진 합리와, 질문자의 합리를 객관화시키는 것은 실제로 대단한 것이다. 주관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합리에 기대어 얘기하는 것은 다양성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 다소 위험할 수 있다. 나는 단지 프로그램을 경험한 사람이고, 그녀는 경험하지 않은 사람일 뿐. 그저 동등한 입장에서 난 그녀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단지 ‘먼저 이런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들어달라며 답변을 이어갔다.


내가 말한 대답은 딱 하나였다. 어쨌거나 내가 이 프로그램 경험자니, 미경험자에게 이 정도 얘기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기로 했으면 뒤돌아보지 말 것

답정너라는 말이 있다. ‘이미 답은 너에게 정해져 있다’는 말. 이미 답을 정해놓고 질문을 하는 것이다. 왜? 대개 나만의 합리를 구체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이런 일은 일상생활에서도 빈번한데 가령,

“나 얘랑 사귀어볼까? 애가 진짜 성격도 좋고 잘생기고 괜찮은데…”

라던지,

“A원피스를 살까, B원피스를 살까? 근데 A가 값도 싸고 훨씬 이쁘긴 해 그렇지?” 라던지.

이 주관적인 선택들을 모두 객관화시키는 매뉴얼이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그렇지 않기에 어쨌거나 이런 주관적 합리라는 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여성분이 결국 프로그램을 안 가기로 결정해도 상관없다. 그냥 가치관이 다른 거니까. 나는 단지 가치관이 이렇게 다를지언정 이 두 관념을 평등하게 바라보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선에서 감싸주고, 체온 실린 객관성만 유지하면 된다.


어차피 답은 이미 앞서 말한 것처럼 정해져 있다. 가기로 했으면 뒤돌아봐서는 안된다. 매사가 그렇다. 연애, 결혼, 취업, 학업, 재테크, 인간관계, 살아가면서 겪는 인생의 모든 중요한 결정들이 그렇다. 뒤돌아 보는 순간 스스로의 합리가 약해져 그 명제에 끌려다니게 된다. 결정을 했으면 그 결정한 주체에 더 큰 힘을 실어야한다. 설령 그게 아닐지라도 주관적으로 정당한 합리에 기대어 그걸 객관화해야 한다. 물론 힘들 거다.

“26살은 아직 젊어요,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세요” 뭐 이런 원론적이고 클리셰적인 말은 더 이상 해주고 싶지 않다. 실제로 이 분이 그렇게 느낀 거면 그냥 그런 거다. 주변에 다 취업하고 잘 살고 있는데 혼자 미국 가서 당연히 뒤쳐진 느낌이 들겠지만 이미 넌 가고 싶잖아. 그래서 합격했잖아. 물론 미국 가면 더 힘든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이방인으로써의 차별도 느낄 수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건강이 악화될 수도 있고, 향수병에 도질 수도 있고, 가고자 했던 직무와 다른 일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근데 그걸 미국과 한국, 이분법적으로만 생각하기엔 세상은 너무 방대하다. 한국이라고 해서 그런 일 안 생길 일 없다.


진짜 재밌는 게 내가 미국 갈 당시 같이 면접 봤던 친구가 나랑 함께 합격을 했다. 그 친구는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결국 가지 않았다. 근데 내가 미국에 갔다 오고 취업을 했을 때 그친구가 회사 메신저에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미국 경험을 알차게 하고 돌아왔는데도 결국은 그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거다. 순간의 선택은 늘 시간이 지나 그게 옳은 결정이었는지 평가받는다. 어차피 똑같은 회사에 취업할 거였으면 미국 갔다 오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갈까, 말까를 고민할 때는 가라 라는 말이 있다. 반대로말할까 말하지 말까는 하지 마라다.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겠지.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하나, 한번 결정을 했으면 다른 걸 고려할 이유가 없다. 미국 가냐 마냐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진짜 작은 결정이다. 순간의 선택으로 인생이 바뀌는 일들이 살아가며 무수히 자리할 것이다. 그걸 한 번이라도 돌아보는 순간 그 생각은 후회로 자리한다. ‘~할걸’, ‘그때 내가 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더 좋았을 텐데•••’ 이런 식이다. 이루어질 리 없고 다시 되돌릴 수 없거니와 되돌린다고 해서 상황이 변했기에잘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그래서 그 후회는 더 비참하고 더 슬픈 것이다.  각 선택지가 포함하는 모든 장점을 안고 싶은 건 욕심이고 욕망이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기회비용을 철저히 따져라. 그리고 그냥 눈감고 질러라. 그리고 그거 하나만 보고 달려라. 그건 절대 실패할 수 없는 도약이다. 세상에영원히 힘든 일은 없고,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다.  물론 결정 뒤 뒤가 아닌 주위를 둘러볼 수는 있겠지. ‘아, 내가 잘 가고 있는 게 맞나?’ 근데 딱 여기까지다. 이 주관적 판단이 방대해지면 삶을 다시 비교 속에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다른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까?’ 이런 식이다. 우리가 가장 피해야 할 것, 계속 뒤돌아보는 이유는 결국 이런 비교와 두려움 때문이다.  


말도 한번 달리면 뒤돌아보지 않고 하늘의 새도 그렇다. 하물며 동물도 이런데? 우리 인간이 러닝이나 마라톤을 할 때도 그렇다. 쉬면 쉬지 왜 뒤를 바라보나.

현대사회가 말하는 성공이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허황되고 날조된 것인지 우린 이미 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본인이 정한 엇비슷한 성공이라도 하려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게 지금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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