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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Aug 22. 2024

외모, 재산 1등의 행복도

순위 매기기의 비극

저 멀리 쿠바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거리를 서성이는꼬마 아이는 본인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 방글라데시 빈민촌에 사는 해맑은 아이에게 행복지수를 묻는다면 다짜고짜 그냥 행복하다 할 것이다. 멕시코 작은 가게에서 타코를 팔고 계신 아주머니도, 하와이에서 내 뒤에 탔던 스카이 다이빙 안전요원도 모두 그렇게 말했다. 본인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그 이유는 각자본인만 안다.


자, 근데 우리는 어떤가. 행복 순위 매기기가 하나의 게임, 아니 일상이 됐다. 더 많이 가졌고 더 잘난 게 행복의 척도다. 남녀가 연애를 함에 있어서도 얼굴이 됐든, 학벌이 됐든, 순위를 매기고 직업을 넘어 결혼, 음식, 여행지, 돈, 취미, 옷차림, 집, 자동차, 주위의 모든 것에 등급을 매긴다.

경차를 운전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경차를 운전하다 끼어들거나, 뭔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주변에서 아주 난리가 난다. 심한 사람은 욕을 하기도 하고, 빵빵대면서 무시 아닌 무시를 한다. 경차주제에 어디 감히 끼어드냐 이거다. 근데 만약 아주 값비싼 외제차를 탄다고 하자. 람보르기니를 탄다고 하겠다. 오히려 50m, 아니500m 근방 아무도 람보르기니 곁에 가지 않는다. 먼저 가시라고 공손하게 자리를 내어준다. 혹시나 사고 날까 봐, 혹시나 흠집이라도 날까 봐 본인에게 피해가 갈까봐 겁을 먹는 거다. 현실도 이와 똑같다. 하다못해 현실에서는 마시는 물에도 등급이 있다. 에비앙이 제일 좋고 다음 제주삼다수, 백산수, 동원샘물, 평창수 이순서다. 이렇게 등급을 매기니까 실제로 물을 마실때도 물 맛이 차이가 나는 듯하다. 내 주변에는 삼다수 아니면 물도 안 마시는 친구도 있다. 이외에도 유튜브에는 외모 순위, 몸매 품평회, 이상형월드컵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자극적인 단어가 썸네일에 있으면 조회수 대박이 난다. 또 직업연봉 묻기(캐치티비)처럼 본인의 직업이나 인생을 평가해 점수화하는 콘텐츠가 유독 요즘많은 이들에게 이목을 끈다. 그게 단순히 킬링타임용이든, 진지하게 궁금해 클릭한 것이든 상관없다. 우리 잘 생각해보자. 한국인은 왜 애초에 이런 의미 없는 지표에 미쳐있는 걸까? 좁은 땅덩어리에서 현재 본인의 위치를 왜 계속 비교하며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걸까?

유독 사람들이 본인과 연관된 무언가를 얘기하는 것에관심이 많은 이유는 현재 생각하고 있는 본인의 생활수준을 정당화 및 객관화하기 위함이다. 나보다 낮은 등급인 사람을 까내리면 본인은 거기서 위안을 얻고(타인을 까내리는 게 본인의 위치를 높이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객관화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에 속하면 좋게 말해 이를 악물고 인생을 열심히 살게 되는 동기부여를 가지고자 함이다. 그 객관화는 대개 본인의 정체성과 조직을 동일시 함으로써 생기는데 과한 몰입의 경우는 본인이 속한 조직이 잘 됐을 때 마치 본인 수준이 올라간 듯양 의기양양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건 어떻게든 처자식 먹여 살리고,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으려는 자기방어기제의 한 종류다. 어쨌거나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좁디 좁은 이 소국에서 모든 돈 되는 것은 제한적이라 피 튀기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이 비교문화는 우리 삶에 생각보다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입시, 취업, 결혼, 출산 등 이 모든 것도 결국 끝없는 비교와 비교 속에 고민하고 결정한다. 이런 비교가 만약 없었다면 입시컨설팅학원이나, 결혼정보회사나, 육아 강의나 책, 취업자소서 첨삭, 면접컨설팅 이 모든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런 글 싸지른다고 조금도 이 사회가 변하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안다. 다만 한 가지 꼭 얘기하고 싶은 건본인만족으로 무언가 얻고 싶은 성취욕이 있다면 그걸로 좋다. 그런데 본인이 올라가려고 남을 깎아내리거나 관계에서 갈등을 조장하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된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내로남불이 나오는 거고, 각자 당하지 않기 위해 방어용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이다. 마치 호신용 호루라기 같은 것.


이 세상에는 80억 정도의 인구가 있다고 한다. 한국은 약 어림잡아 5,200만 명 정도 된다. 이 5,200만 명은 각자 외모도 다르고, 몸매, 감수성, 예술적 재능, 공감능력, 소비습관, 대인관계, 지식의 정도, 사는 곳, MBTI, 나이,피부, 옷차림, 취미 등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이 전부 다르다. 당연히 하나의 기준을 정해 잣대를 들이대고 순위를 매기면 나뉠 수밖에 없다는 걸 언론과 미디어는 철저히 이용해 혼돈으로 내몰고 있다. 왜냐? 우리는 관찰력이 아주 뛰어난 민족이거든. 눈이 세 개, 네 개 달린 것 마냥 남이 뭘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얼마를 버는지에 관심이 너무 많거든. 학교, 회사, 장사, 정부, 언론, 유튜버 모든 조직은 이들을 하나의 잣대로 경쟁시키면 경제적 및 부가적인 막대한 이익이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관련 콘텐츠들을 양산하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에 젖어든다.

아, 물론 경쟁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성취욕이 있는 사람들. 이건 안 좋은 게 아니라 선한 영향력이다. 스스로를 극한 상황에 몰아넣으며 본인의 수준을 높여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을 받는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삶을 더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해줌으로써 타인을 편안하게 한다. 일론머스크 같은 사람들이다. 비범한 사고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 20년 전엔누가 전기차를 생각이나 했겠나. 근데 이건 결국 그 한사람의 '취향'일뿐이다. 사회 전체가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 집중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피로를 느끼고 금세 포기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청년 백수 100만 시대다. 이중에는 열심히 노력했는데 취업에 실패한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과도한 경쟁과 피 튀기는 싸움이 두려워 혼자만의 세상으로 숨은 은둔자들도 많다. 이 어둠과 혼란이 그들을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으로 나타나고 이는 범죄나 사회문제로 번지곤 한다. 이 경쟁이 경제적인 성장과 부를 일궈줬다면 이제는 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손잡고 이끌어줄 방파제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무언가에 고도로 몰입할 때 삶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느끼지만, 동시에 내려놓고 이 순간을 받아들일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우린 이제 살펴야 한다.


외부에서 경쟁으로 발생한 무언가가 나를 채운다고 단정 짓고 사는 건 거짓된 안정감일지 모른다.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결국 내가 나로 존재할 때 우리는 이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게 어떤 조건의 탑티어에 소속된 것보다 더 행복할 것이다.


하나 확실한 건, 아무 의미 없는 비교논쟁에 본인이 탑티어에 있다고 해서 우쭐대지 않고, 본인이 최하위에 있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비교논쟁에 관련 없이 쉽게 부당한 결과에 숙이지 않고, 본인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냥 1등이든 2등이든 상관없이 내가 나로 존재하면서 나 먼저 챙기는 것이 가장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내 밥그릇이 차있어야 남한테도 줄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렇게 살다 어떤 한 분야에서 높은 위치까지 갔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도전하고 본인에게 덤벼드는 용감함을 기꺼이 받아주고 그 자리를 내어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오르지 못하게 사다리를 잘라버리는 한국사회가아니라. 그게 어쩌면 비교사회의 선한 변형일 것이다. 우린 그렇게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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