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까’가 만연한 현대사회
세상살이가 참 팍팍하다. 공짜는 찾아볼 수 없고, 남의 돈 내 주머니 넣는데 많은 노력과 수고스러움을 필요로 한다. 각자의 삶은 본인 마음대로 되지 않고, 일상은늘 큰 이벤트 없이 반복투성이다. 목표한 대로 삶을 이룬 사람들만 있다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유토피아일 것이다. 대부분이 본인의 노력으로만 극복할 수 없는 무수한 한계점들에 그대로 순응하며 살아간다. 원래 인생은 이런 것이라며 자기 위안을 습관화한다. 인생은 간헐적 유희와 이 간헐적 유희를 위해 버텨가는 지속적인 고통이라고. 이 시니컬한 사고에 남들보다 조금 깊게 몰입한 이들은 서서히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래서 안 되는 거야 ‘
‘열심히 했는데 안 되는 걸 보니, 나는 이 정도까지 인가 봐’
‘아무리 노력한들 환경이 이래서 위로 올라갈 수가 없어’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며 자조 섞인 웃음을 달고 산다. 이는 대개 본인이 살아오면서 단 한 번의 성취도 느껴보지 못한 이들에게 나타난다. 본인이 정한 그 ‘성공’은그야말로 크기보다 빈도가 중요해서 결국 노력으로 일궈낸 결과의 만족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출발선부터 꼬여버린 것이다. 이들은 안타깝게도 앞으로 일어날 매사에 겪는 모든 일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습관처럼 자기 연민을 일삼고 본인을 갉아먹는다. 쉽게 상처받으며 피해의식이 만연하다. 이렇게 나만의 세계는 점점 편협해져 간다.
문제는 이 중에서 몇 명은 한 가지 끔찍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자기 연민에 적응한 이들이 본인만 작아져가고 열등감에 시달리기엔 뭔가 억울한 것이다.
왜 똑같은 세상에 태어나 본인만 늘 불행해야 하고 가난해야 하며 남들 다하는 연애, 취업, 재테크 이 모든 걸 경험도 못 해야 하는가. 그들은 본인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 삶의 수준과 척도가 더 이상 낮아지지 않기 위해 기가 막힌 방법을 하나 고안해 낸다. 내 비교대상, 표본집단 전체를 ‘하향평준화’시키는 것이다. 대상은 내 주변의 모든 것이다. 그렇게 하나 둘 타인을 까내리기 시작한다. 신조어 ‘억까’는 이렇게 양산됐다.
억까는 ‘억지로 까내린다’를 줄인 말로, 대상을 비난하는 이유가 말이 안 되게 억지스러울 때 쓰는 말이다.
대개 앞서 설명란 자기 연민과 열등감에서 주로 표출되며 특히 한국인 종족특성이라 할 수 있는 ‘냄비근성’이 합쳐지면 정상인 한 사람을 반신불구로 만들어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건 일도 아니다. 절대 본인이 직접적인 해를 끼치진 않는다. 아주 지능적으로 상대가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이런 억까는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발생하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본인. ‘세상이 날 억까한다’라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되는 일마다 죽 쑨다는 것이다. 가령, 아침에 출근길에 나왔는데 지갑을 두고 왔고,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고, 차는 놓쳐서 지각하기 일보직전이고, 일은 쌓여있고, 몸은 피곤에 절어있고 뭐 이런 식이다. 이는 대개본인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라 삶에대한 자조로만 받아들이면 되나, 이 화살이 타인을 향할 때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억까가 타인을 겨냥할 땐 대개 본인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얕은 지식과 강한 신념이 합쳐질 때 주로 발생한다. 이들이 마음먹고 본인만의 논리를 가지고 덤벼들면 아무리 그 분야의 전문가나 훌륭한 지식을 겸비한 사람이 있다한들 순식간에 무너져버린다. 상대방의자존감을 빼앗아 버린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늘 자기 방어기제가 발동할 수밖에 없고, 현대인은 인간관계에서 상호 간 견제와 예민함을 달고 사는 것이다.
인간의 본래 습성이 그렇다. 남 잘되는 꼴 못 본다. 그걸 절제해 가며 숨기고 사는 게 ‘사회생활’이다. 내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사실 가족뿐이다. 아니, 어쩌면 가족 중에서도 부모뿐이다. 그걸 인정하면서도 티를 내지 않는 사람,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둘째치고 이를 악용해 타인을까내리는 사람은 어떻게든 그대로 갚아주어야 한다. 무식하고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어떻게 이를 선한 방향으로 갚아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
서로가 스스로에게 ‘가치’에 대한 질문을 하면 된다. 현대사회는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질문할 기회를 여태껏주지 않았다. 아니, 돈 버느라 줄 기회가 없었다. 결국 여기서는 ‘좋은 삶’이란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는 삶의 방식이나 진로군에서 모든 길이 거의 비슷한 표본으로 수렴한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매몰돼 남들 따라 목표를 정하는 경우가 많고, 이런 가치획일화 속 진짜 내 안의 것이 나오기가 힘든 환경이다. 그러니 남들이 정해놓은 그 표본에 들어가지 않으면 까내리고, 설령 들어갔다 해도 본인이 더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남을 억지로 까내리기 ‘억까’하는 것이다. 진짜 본연의 삶의 가치를 떠올린다면 억까할 시간도 없을 텐데.
우리는 각자의 삶의 가치에 대해 물어야 한다. 연봉 5천만 원 이상, 서울의 자가 마련 이런 게 아니라, 그걸 서로 비교하고 어디까지 왔나 재는 것이 아니라, 바운더리를 정해 그 안에서만 생각하도록 마인드를 설계해야 한다. 그 바운더리 안에 있는 것이 가치다. 가령 내가 명품백이 필요 없다는 가치가 있으면 애초에 바운더리 안에 명품백은 없는 것이다. 명품백사고 허세 가득한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이들을 억까할 수 없다. 왜? 나는 명품백을 안 가져서 그들보다 불행한 게 아니니까. 애초에 내 가치(바운더리)에는 명품백이 없으니까. 그들은 그들 자체의 인정과 명예를 가져도 전혀 배 아파하지 않는다. ‘그들의 바운더리엔 명품백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같은 범주가 아닌데 왜 까내리나. 단, 이 가치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계속 바뀐다면이 바운더리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
본인이 어떤 하나의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그 목표를 이뤘을 때 만족하는 삶. 남들이 억까하든 무관심이든 뭐든 좋다. 내가 내 바운더리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것들에 온 정신을 쏟고 그걸 더 나은 수준까지 만들어가는 것. 그 희열은 스스로의 가치가 만든 것이며,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 희열이결국 삶을 사는 이유다.
남을 아무 이유 없이 까내리는 ‘억까’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말해라. 그렇게 불편하면 여기 있질 말고, 하지 말고, 보지도 말고, 집 밖에 나오지 말고 혼자 방에서 사시라고. 그렇게 불편하시면 자세를 고쳐 앉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