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다는 것은 곧 내가 나를 온전히 믿어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온라인 창업 강의'
'0에서 시작하는 지식창업'
'다 알려주는데도 못하면 그냥 사업하지 마세요'
'인스타그램으로 퍼스널 브랜딩 하기'
온라인에 이런 식의 강의를 자주 보게 된다. 부쩍 광고가 많아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예전에는 고액으로 판매하는 소수에게 집중되던 것이 이제는 저가로 판매하는 다수가 돼버려서 그런 건지, 어쨌든 자꾸 눈에 밟힌다. 순간 혹하여 '이거 한 번 들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어느새 상세 페이지를 훑고 있는 나.
그렇게 결제한 강의만 몇 개인가. 그중에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한 건 결국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왜 이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마음이 쏠리는 것일까. 그냥 기가 막힌 카피라이팅으로 욕망과 불안을 자극하는 저 판매자들이 나쁘다고 생각하기엔 나 자신이 너무 치졸해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호구도 당하다 보면 호구력이 생긴다고, 그냥 뻔해 보이는 상세페이지는 알아서 재껴버리는 능력이 생겼다. 물론 가장 큰 이유은 경제적인 이유겠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제는 퍼스널 브랜딩이나, 인스타그램 관련 강의를 추가 결제할 마음이 생기면 그냥 그 돈으로 책을 사서 보는 게 낫다는 판단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나를 봐왔던 지인은 이제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할 정도다.
"알레 님, 이제 그만 결제하세요! 알레 님은 인풋은 이미 충분해요. 아니 과해요. 이제부터 아웃풋을 만들어 내는데 집중하세요."
이 말을 듣는데 진심으로 현타가 찾아왔다.
'아, 난 왜 이런 호구 짓을 계속하고 있었을까?' '내가 정말 호구여서 그런가?'
비단 나만의 일일까? 아니다. 분명 이 글을 읽으면서 씁쓸한 표정을 짓고 계신 분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니, 솔직히 나만의 문제가 아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유에 대해 참 많이 고민해봤다. 무엇이 문제일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불안'과 '호기심'의 잘못된 만남 덕분이다. 우선 퇴사 후 1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경제적 불안정은 가치 판단에 있어 확실히 부정적인 작용을 한다. 화려한 후기와 현란한 액수를 보여주면서 '내 강의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식으로 꿰어 버리니 불안한 놈이 안 꼬여버릴 수가 있겠나.
거기에 이 쓸데없는 호기심도 문제다. 때로는 오지랖이라는 이름으로 또 어떤 날은 배움에 대한 열정이라는 모습으로 둔갑하여 불쑥불쑥 나타나는 호기심.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강의를 하길래, 어떤 지식을 알려주길래 강의 한 번 오픈하면 수 천, 수 억을 번다는 것일까'하는 생각은 주저주저하다 결국 결제하기 버튼을 누르게 만든다.
그런데 말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의 화려한 후기도 뱀의 혀 같은 카피도 아니었다. 그렇다. 진짜 문제는 언제나 나 자신이다.
나의 호기심 부분을 계속 자극시키는 주요 원인은 애매함이었다. 나는 늘 나 자신에 대해 애해함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 나에 대한 질문인데 항상 답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몇 가지 답을 찾아보았다.
1. 비교.
인스타그램을 하다 보면 100개도 안 되는 게시물과 시작한 지 1개월 만에 팔로워 5000명, 10000명을 만들었다는 글을 최근 들어 자주 보게 된다. 궁금해서 게시물을 훑어보지만 도무지 답을 모르겠다. 뭘까. 그들과 나는 무엇이 달라서 그들은 퀀텀 점프를 하는데 나는 여전히 제자리일까 하는 생각에 심정이 복잡해진다.
우리는 살면서 수시로 누군가와 비교하게 된다. 혼자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기에 비교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 비교를 하면서 느껴지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문제가 된다. 특히 내가 열망하고 있는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나, 별안간 초고속 성장을 이뤄낸 사람을 만나게 되면 더욱 상대적 박탈감이 커져버린다.
원론적인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비교는 또 다른 비교를 낳고 끊임없이 자신을 밑 빠진 독으로 만들 뿐이다. 이럴 땐 차라리 디지털 디톡스가 답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마음의 소란을 잠재우고 다시 페이스를 찾아가는 멘털 관리가 필요하다.
2. 임계점.
예전에 서핑을 하는 친구에게 잘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다. 그 친구의 답은 간단했다. "바닷물을 다 마신다고 생각하면 돼." 무엇을 하든 임계점이 존재한다. 독서나 글쓰기도 임계점을 넘어서야 비로소 탄력을 받는다.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좀이 쑤셔 들썩 거리는 단계를 넘어서야 그제야 진짜 독서의 시간이 시작된다. 글쓰기는 어떤가. 온통 하얀 여백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만 비로소 한 편의 글쓰기가 시작되는 법이다. 짧게는 몇 분 몇 시간이겠지만 길게는 몇 달 또는 몇 년이 지나야 임계점에 도달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가령 십 년의 무명을 견디고 일약 스타가 되는 배우들이나 가수들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된다.
사람의 인생에도 임계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루한 정체기가 지속된다면 자신의 무능력함을 탓하기 전에 아직 임계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3. 수익화 경험.
나의 모든 경험이 돈으로 연결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주변을 보면 수익화만큼 가장 확실한 동기부여는 없어 보인다. 수익화가 의미하는 것은 그저 돈을 벌고 못 벌고에 국한되지 않는다. 내 상품이, 서비스가 팔리기까지 숱한 날 동안 공부하고 경험해보며 시행착오를 겪는 시간을 견뎌냈음을 뜻한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해당 분야에 대해 과연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하게 된다. 그런 심적 부담마저 이겨낸 뒤 탄생하는 서비스는 얼마라는 자신만의 격을 부여받아 판매되기 시작한다.
물론 판매가 전혀 안될 수도 있겠지만 판매가 시작된다면 적어도 나의 지식은 그만한 격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4. 멀티태스킹
직장인의 능력은 멀티태스킹 능력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평균 연령대가 높거나 소수가 근무하는 직장에서 젊은 사원들에게는 멀티태스킹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멀티태스킹은 사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순간적으로 스위치를 껐다 켜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한 가지에 깊이를 갖기 위해서는 역시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5. 심리적 요인
겸손이 미덕인 삶은 자칫 스스로를 위축시켜버리는 것으로 왜곡되어 버릴 수도 있다. 더닝-크루거 효과를 보면 낙담의 골짜기(Valley of Despair)라는 부분이 나온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능력이 없는 열등한 존재로 여기며 침체를 경험하게 되는 구간인데 급성장을 경험하던 사람이 기나긴 정체기를 맞이했을 때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급성장을 이뤄낸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재능을 애매하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를 본 적이 많다.
위의 다섯 가지 경우 외에도 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애매함을 극복하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은 경험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해가며 실력을 키우는 것이다. 몸 값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의미한다. 몸 값이 높아질수록 나의 가치는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시 말해 내가 가진 능력은 애매한 것이 아님을 반증해준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온전히 믿어주는 것이지 않을까?
금액으로 인정받는다면 확실하겠지만 돈 만이 가치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 나 자신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잠시 삶의 방향을 잃어버려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넘쳐나는 정보와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하다 보면 중심을 잡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그럴 때일수록 내가 가진 것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내 감정, 내 생각, 내 욕망 등,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들어주어야 진짜 애매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지금 내 안에서 가장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 그것에 애매함을 넘어설 수 있는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