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내가 행복해질 자격 있는 거가?"
"그런 자격은 나도 없어. 근데 우리 지금 충만하잖아.
아무런 자격 없이. 이미 주어졌다고."
영화 <로기완> 중
영화 속 기완과 마리의 대사가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행복해질 자격'이라는 말이 유난히 메아리친다.
영화 속 탈북민이며, 어머니의 죽음으로 새로운 삶을 얻은 기완과, 안락사를 선택한 엄마에 대한 슬픔과 자책감에 빠져 살던 마리. 지금껏 둘의 삶은 행복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삶이었다. 그럼에도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의지할 누군가가 생기니 충만함을 느낀다. 그리고 깨닫는다. 행복은 아무런 자격 없이 이미 주어진 것임을.
살아가는 동안 우린 참 많은 조건 앞에 선다. '조건에 따른 보상'은 가장 간편하게 행동의 당위성을 만들어 낸다. 많은 자기 계발서에 보상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걸 보면 보상이야 말로 행동의 동력이 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보상은 자칫 더 큰 보상에 대한 욕구가 될 수 있다. 보상 앞에는 언제나 조건이 따른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조건의 수준이 높아지고 보상의 수위가 강력해질수록 행복과 절망의 간극이 벌어진다. 행복과 절망. 둘 중 어떤 것을 더 학습하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능성에 닿을 수도 있고 장애물에 머물 수도 있다. 그런데 가능성과 장애물은 한 끗 차이일 뿐이다. 어느 쪽에 서 있든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다.
최근 몇 년간을 돌아본 나의 삶은 장애물을 더 많이 인식하는 삶이었다. 장애물과 가능성은 언제나 공존한다. 장애물에 기준을 두고 가능성을 보느냐, 가능성에 기준을 두고 장애물을 보느냐에 따라 움직임이 달라질 뿐이다. 넘어서지 못하고 움츠러들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쓸모'라는 기준이 생겨났다.
'쓸모'라는 기준을 세우고 나 자신을 마치 용도에 따라 지어진 것으로 간주하니 주어진 행복조차 조건에 따른 보상쯤으로 착각했다. 그리고 자꾸 쓸모 있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 속으로 참 많이도 뭉그러졌다.
행복은 아무런 자격 없이 이미 주어진 것임을 받아들이는 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왜 그리 쓸모를 고민하며 나를 용도에 따라 지어진 것으로 간주했을까. 살아보니 결국 '삶'이 가장 큰 보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라면서 세워졌던 조건들은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것들이었음을, 그래서 지금 내가 안전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글을 쓰며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수록 그리고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왜 그리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을까 싶다. 삶은 우리에게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권을 줬을 뿐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이 존재로서의 행복을 침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두어서도 안된다.
'오늘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물음 앞에 선다면, 기꺼이 '그렇다'라고 답해 보자. 상황 때문이 아니라 존재 만으로도 우린 그렇게 답해도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