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레 Apr 05. 2024

나를 안다는 것의 의미

내 안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 이야기는 나와 당신의 삶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고 강력한 힘이다. 평소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분명히 존재한다. 


그 이야기는 태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을 거쳐 축적되었다. 그렇기에 모양을 가늠할 수 없다. 어떤 색을 띠고 있는지 조차 판가름하기 어려운 정도다. 그 이야기는 다른 말로 잠재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고 셀프 스토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무엇이라 일컫든 그건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오늘의 나의 삶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이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살아오면서 기록된 나의 이야기를 정작 내가 궁금해하다니. 얼마나 모순된 생각인가. 그러나 셀프 스토리는 셀 수 없는 단계의 변화를 거쳐 형성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나에게 질문을 해야만 겨우 닿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돼버렸다.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매일 글을 쓰며 나를 바라본다.


매번 같은 자리에서 맴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유난히 어렵다고 느껴지고, 결국 해야 하지만 하기 싫어 미루고 또 미루기를 반복하는 그 지점. 그 지점을 들여다보면 셀프 스토리의 실마리를 포착하게 된다. 거기에서부터 내면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한 가닥을 따라 내려가며 얽힌 실타래를 조심스럽게 풀어야만 한다. 


나를 안다는 것은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린 자신을 알기 위한 시간을 미루며 살아왔다. 누군가 찍어놓은 점을 바라보며 달려야만 했다. 낙오자, 실패자, 아웃사이더 등 가장 굵은 물줄기에서 벗어난 삶으로 낙인찍히는 건 더 이상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삶으로 간주되었으니까. 조명이 비추지 않는 무대의 한쪽 구석에서 몸부림치는 것과 같으니까.


세상은 이미 바뀌었다. 지금은 바야흐로 나에게서 출발해야만 하는 시대다. '나'를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다변화하는 시대에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다. 이제는 자기를 알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 필수 과목이 되어야만 한다. 부모라면, 어른이라면 응당 자신을 돌아볼 인지능력이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을 깊이 바라봐줘야만 한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나열해 보는 것도 좋다. 그런데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표면적인 것들에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표면적인 것들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솔직히 짜장면을 좋아하든 짬뽕을 좋아하든, 탕수육을 부먹으로 먹든 찍먹이든 그게 대체 뭘 의미할까.


MBTI도 좋고 애니어그램도 좋다. 뭐든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결과지에 갇히면 안 된다. '나'는 우주와 같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주는 특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무한하다. 그러니 나를 특정 프레임이 가둬두고 짜 맞추듯 행동하면 오히려 유연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요즘 드는 생각은, 어쩌면 우리 자신을 무어라 특정하려 하는 게 잘못된 접근인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단정 짓는 생각은 명료함을 주지만 환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나'를 흘러가지 못하게 막아서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알기 위해 필요한 건 흐름의 방향을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나'를 이루는 커다란 물줄기. 그것을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이전 04화 시간은 걸리더라도 내 속도로 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