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젊은이의 도시 튜빙엔 ( Tubingen) , 독일
생면부지의 피아가 우리를 만나러 오고 있다. 오늘 하루 종일을 우리와 함께 보낸다고 한다. 회사도 안 가고 한 시간을 운전해서 와서는 튜빙엔 이라는 중세 도시도 투어 시켜주고, 펀팅 뱃놀이도 예약하고 저녁까지 근사하게 대접해 주겠다고 한다. 대체 피아가 누구길래 얼굴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런 대접을 해주려는 걸까?
피아를 설명하자면 먼저 울리를 소개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약 20여 년 전에 스티븐이 누나인 캐롤린과 멕시코로 여행을 갔을 때 한 호텔에서 울리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게 하고 따뜻하면서도 개성 강한 그와 단번에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스티븐은 유럽에 갈 때마다 슈투트가르트의 울리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 울리가 피아의 대부이다. 울리는 피아의 부모님과 각별한 친구였고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울리가 피아의 대부가 되었다. 평소에 울리는 피아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진짜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그런 울리 할아버지가 2019 년에 86 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그의 갓선인 피아에게서 연락이 오고, 5 년 전 울리와 함께 우리에게 동독 여행을 시켜주었던 피터 부부와 연락이 되었다. 피터와 일세가 숙소도 제공해주고 데리고 다니며 관광을 시켜주는 것도 고마운데 오늘은 피아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온다는 것이다. 피아는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어떤 인연을 만들어 가게 될까? 지난번
스티븐이 울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울리가 피아는 자기와 판박이라며 자기와 아주 비슷하다고 했다고 한다. 키도 작고 얼굴도 둥근 울리를 떠올리며 피아를 기다렸는데, 웬걸 키도 크고 아주 잘 생긴 40 대 초반의 매력적인 남자가 피아라며 나타났다.
왼쪽 일세와 피터, 오른쪽이 피아.
피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의 대부였던 울리와 여행도 많이 다니고 정말 사이좋은 부자처럼 지낸 것 같다. 울리가 떠난 후 울리의 모든 유품을 자신이 정리하고 있고 사진이며 서신이며 종류별 연대별로 분류작업을 하고 지인들 연락까지 다 마치는 등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유품 목록뿐만 아니라 서신과 사람들의 관계를 모두 카테고리별로 분류해 사진과 함께 아카이브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목표는 2-3년 안에 다 끝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문득 울리가 어떤 사람인지, 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도대체 어떤 삶을 살면 사람 사이에 이런 진심 어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사람들이 그로 인해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그의 이야기를 나누며, 피아는 정성과 진심으로 대부의 인생을 정리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다.
"자, 이젠 떠나야 해."
피터의 말에 간신히 피아의 이야기를 끊고 피아가 예약해 놓은 튜빙엔 ( Tubingen)으로 펀팅 (punting)을 하러 나섰다. 튜빙엔은 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중세의 길과 건물, 성이 아름답게 잘 보존되어 있는 독일 남서부의 작은 타운이다. 타운을 가로지르는 넥카강을 따라 독일 특유의 컬러풀한 건물들이 아름답게 줄 지어 서 있고,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공원과 섬이 강을 따라 잘 어우러져 있다.
튜빙엔을 대표하는 사진 중 하나. 넥카 강의 펀팅 보트가 보인다.
펀팅 뱃놀이는 납작한 배를 뱃사공이 긴 막대를 이용해 강바닥을 밀면서 다니는 것으로 유럽의 몇 군데 강에서 할 수 있는 뱃놀이이다. 영국 캠브리지 강에서도 펀팅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유럽의 여러
곳에서 행해지는 뱃놀이인 모양이다. 마치 베니스의 곤돌라처럼 한 뱃사공이 배의 뒤편에 서서 배를 움직인다. 그런데 곤돌라에 비해 이 배는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다. 우리는 단 5 명이라 배가 한적하고 좋았지만 결혼식 피로연으로 배 관광을 하는 보트들은 약 15 명 정도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저 많은 사람을 태운 뱃사공은 엄청 힘들어 보인다. 배에 승선하기 전에 예약을 확인하는 곳에서 모두 맥주 한 병씩 가지고 타라고 한다. 그래서 우린 일인당 한 병씩 사서 배에 올랐다. 맥주를 좋아하는 독일인답다. 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강가에 줄지어 서있는 건물들의 모습이 하늘과 나무를 배경으로 멋진 전망을 선사한다. 강 중앙에 공원처럼 조성된 숲의 푸르름은 눈뿐만 아니라 마음도 시원하게 정화시켜주는 듯하다.
펀팅 보트. 일세, 피터 그리고 피아
튜빙엔시 입구의 돌다리를 지나다 보니 강가의 높은 축대 위에 젊은 친구들이 줄줄이 앉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4 월에는 이 강에서 학생들이 펀팅 시합을 한다고 한다. 물살이 교차하는 한 구역에서는 배들이 부딪히고 뒤집히는 해프닝이 자주 벌어져 배꼽을 잡고 구경을 한다고 한다. 배를 돌려 다시
돌아오는 그곳에는 프레드리히 홀더린 ( Friedrich Holderlin)이라는 시인이 죽을 때까지 살았다는 홀더린 타워 ( Holderlin Tower)가 강가에 중세 성처럼 예쁘게 서있다. 그동안 날씨가 좋지 않았다는데 오늘은 날씨가 화창해서 보트 타기에 안성맞춤이다. 강을 가르며 얼굴에 와닿는 상쾌한 공기, 따스한 햇살, 푸른 하늘에 동동 떠있는 뭉게구름, 마음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나는 한 폭의 그림 같은 그 순간을 마음과 사진에 분주히 담았다.
수없이 퍼져있는 작은 골목길들,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돌바닥과 돌계단들, 골목골목 숨어있는 카페와 레스토랑, 즐비하게 늘어선 독일의 전통적인 건물들. 펀팅이 끝나고 구석구석까지 아기자기하고 예쁜 이 중세 타운을 탐험했다. 커피숍, 작은 상점, 음식점들이 모두 중세 분위기에 녹아들어 있다. 길가에 펼쳐진 마켓에서는 식자재와 꽃들을 팔고 있고, 파라솔 아래 예쁜 탁자에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튜빙엔은 이 지방에서 하이델베르크 다음으로 큰 대학타운이다. 이 도시에 대학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 자체가 대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활기차고 젊은 도시이다. 그러면서도 오랜 세월이 숨 쉬는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건물들은 중세 이전부터 약 200 년 전까지 지어진 건물들이 대부분인데 그중에서도 마켓 광장에 위치한 시청이 눈에 확 띈다. 청동색 지붕의 작고 뾰족한 탑들과 화려하고 정교한 외부벽이 매우 독특하다. 1400 년대에 처음 지어졌다는데 한번 보면 못 잊을 것 같이 특이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우리는 타운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성 (Schloss Hohentubingen)에 올라가 전망을 감상했다. 도시뿐 아니라 넥카강과 멀리 산의 계곡까지도 보인다. 무려 1078년에 이 성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언급이 되었었다니 정말 오래전에 세워진 성이다. 이후 개축과 증축을 반복하면서 16 세기에 르네상스 스타일의 로마식 개선문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대학과 여러 기관에서 이 성의 건물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런지 성안에 대학생들과 교수들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다시 타운으로 내려와 가장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의 노천카페에서 커피타임을 가지며 휴식도 취했다. 이렇게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우리 모두는 마치 수십 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서로에 대해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양사람들은 자신을 노출하기를 꺼려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제까지 관찰한 결과 서양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자기 집 숟가락이 몇 개 인지도 오픈하는 사람들이다. 질문을 하면 좀 쑥스럽고 부끄러운 이야기라도 모두 사실대로 대답을 해준다. 이런 솔직함과 진실함 때문에 친구가 금방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시간에서 쉴 새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피아였다. 그런데 말을 예쁘고 배려있게 해서 전혀 밉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의 대화를 모두 즐거워한다. 말이 많은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인데 피아가 딱 그랬다. 모르는 것이 없으니 할 말이 어찌나 많은지. 나는 나도 모르게 예전에 먹어본 디저트 이름과 레시피까지 물어보다가 아차 싶었다. 그걸 어찌 알까 싶어서였는데 역시, 그것도 알고 있었다.
피아가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예약한 레스토랑은 아주 오래된 고택의 모습과 구조를 대부분 그대로 간직한 비어가든이었다. 오랜 전통을 간직한 곳을 가면 아주 흥미롭다. 주인의 개성과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함께 다니다 보니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된 듯한 우리는 다시 울리의 이야기를 하면서 정답고 진솔하게 시간을 함께 보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죽은 친구를 추모하려고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뭐 이런 소재의 영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나를 기억하면서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어 줄 사람이 있을까,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나의 인생을 다시 한번 되짚어 줄 사람이 있을까. 아, 이 울리라는 분, 인생을 참 잘 사셨구나! 끊이지 않는 웃음과 유쾌함으로 마음은 즐거웠고, 가슴은 진한 감동으로 물들었던 이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야외 비어 가든에 자리 잡았던 우리가 고택 레스토랑 내부를 구경하겠다고 일어섰더니 피아가 설명을 해주겠다고 선뜻 따라나선다. 울리가 피아는 속이 아주 영근 사람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는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다. 혹시나 놓치는 게 있을까 여기저기 따라다니며 쉴 새 없이 설명해주고 이야기하는 피아. 진심 가득한 매력적인 수다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