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7. 샴페인에서 브뤼헤 ( Brugge)로, 벨기에
세버린과 디디에의 집을 떠나는 날 아침 식사는 날이 궂어서 정원이 아닌 집안 다이닝 룸에 준비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이닝 룸은 현관 입구에서 두 계단 정도 내려가는 곳으로 현관과 이층 계단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바닥이 오래된 나무 플로어로 된 커다란 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두 번째 계단을 내디뎠을 때 나는 와! 라며 탄성을 질렀다. 바로 내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프렌치 팜 하우스 스타일의 다이닝 룸 그 자체였던 것이다.
벽 한 면만 빼고는 전체적으로 하얀 톤이다. 사진에 없는 정원으로 향한 유리문이며 벽은 모두 하얗다. 집안으로 통하는 문들은 회색과 녹색, 푸른색이 살짝 섞인 프랑스다운 색이다. 나는 가끔 초크페인팅으로 가구를 칠하는데, 그때 사용하는 애니 슬론의 초크 페인트에서 이 색을 덕에그 ( Duck Egg) 색이라고 한다. 이 색은 정말 프렌치스럽고 앤티키하다. 전체적으로 하얀 톤의 공간에 덕에그색의 문을 보니 은은하고 부드러우면서 기품도 있어 보인다. 고 가구들, 앤티크 한 그림, 벽 귀퉁이나 가구 위에 놓인 장식품들, 커다란 프렌치 다이닝 테이블과 의자들. 꾸미지 않은 그냥 소박한 프랑스 농가의 모습이다.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그 모습 그대로 같다. 이게 바로 프렌치 팜하우스 스타일 인테리어구나.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닌 그들의 역사와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인테리어다.
우리는 요세미티에 집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중 마스터룸은 프렌치 스타일로 꾸며 놓았고 두 번째 방은 캐빈 스타일로 꾸며 놓았다. 프렌치 가구에도 관심이 많아 나중에 의자와 작은 협탁을 하얗게 초크 페인트로 칠해 집안 한편을 장식하고 싶어 인터넷과 앤티크 상점을 자주 검색하고 있다. 이번 세버린과 디디에의 집은 많고 많은 프랑스 집중에 하나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그들의 가구를 작은 의자 하나까지 유심히 보았고 전체적인 가구 배치도 눈여겨보았다. 잡지나 인터넷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보며 느낀 큰 그림이 생겨 이것도 이번 여행에서 얻은 점이다.
또 하나 이번 프랑스 여행에서 얻은 것은 프렌치 버터이다. 미국에서도 프랑스산 버터를 구하기가 만만치 않다. 몇 군데 마켓에서 파는 것은 한정되어 있고 값도 무척 비싸다. 나는 향이 은근하면서도 맛이 풍부한 프랑스산 버터를 좋아하는데 아직도 갈길이 먼 여정이지만 무리를 해서 버터를 5가지나 샀다. 여행 내내 냉동을 잘했다가 집에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번거롭지만 이번 여행에서 꼭 사 가지고 갈 단 한 가지였으므로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세버린과 디디에에게 안녕을 고하고 다시 뒷동산 길을 통해 에페르네로 향했다. 이제 몇 달 후면 이사 갈 세버린과 디디에에게 응원을 보낸다. 젊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곳으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그들. 세버린은 자기가 평생 관심을 갖고 좋아하던 주얼리 작업을 이제는 좀 더 프로페셔널하게 할 수 있다며 눈을 반짝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 순간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꿈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나 보다. 집 옆에 마련한 커다란 작업 스튜디오에 잠깐 들러 그녀의 주얼리를 둘러보고 귀걸이 한 쌍을 샀다. 참 고상하면서도 매력적이다. 그녀처럼.
가는 길에 뒷동산에 잠깐 내려 다시 풍경을 감상하고 사진 몇 컷을 찍었다. 그런데 날이 안 좋아서 좀 흐리다. 올여름은 날이 너무 안 좋아 샴페인 농사가 망했다고 한다. 포도가 잘 익어야 할 이 여름에 8월 중순인 오늘까지 해가 쨍쨍 난 날은 고작 3일이었다고 하니, 포도 농사가 잘 되었을 리가 없다. 그저께 들렀던 이 동네 로컬 샴페인 와이너리 주인인 파스칼은 올해는 거의 망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자기 친구의 포도원은 서리까지 맞아 포도가 못쓰게 돼서 전량을 다 버려야 한다고 했다. 과연 우리가 뒷동산에서 본 포도들은 다 말라비틀어져 있거나 아예 포도가 자라지도 못한 상태로 있었다. 안타깝게도 2021년 샴페인은 기대할 수 없겠다.
에페르네에는 샴페인 거리가 있다. Avenue de Champagne이라고 한다. 샴페인 거리는 별명도 하나 가지고 있다. 에페르네의 샹젤리제 거리이다. Champs-Elysees of Epernay라고 부른다고 한다. 굴지의 샴페인 샤토가 모여있는 이 샴페인 거리 지하 동굴에 2조 달러 상당의 20억 병도 넘는 샴페인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폐 가치로 파리의 샹젤리제보다 훨씬 비싼 곳이라 이곳을 에페르네의 샹젤리제라 부른다.
에페르네 샴페인 거리에 도착하면 첫 번째로 눈에 띄는 하얀 건물이 모엣 샹동이다. 건물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된다. 주욱 걷다 보니 우리가 모르는 샴페인 샤토도 무척이나 많다. 내가 아는 곳은 모엣 샹동과 페리에 쥬엣뿐이다. 스티븐은 몇 개 더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샤토들의 규모과 화려함은 극치에 이른다. 어떤 샤토는 박물관으로 어떤 건물은 호텔로도 쓰이고 있다.
최초로 땅을 파서 샴페인을 저장한 사람은 후에 샴페인 하우스까지 만든 장본인인 클로드 모엣(Claude Moet)이라고 하니 역시 모엣 샹동이 샴페인 프로덕션의 원조임에 틀림없다. 제대로 된 와인 저장고는 1720년에 만들어졌고, 1793년 이후로는 그의 손자인 장-레미 ( Jean-Remy Moet)에게 전수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이 샴페인 거리에 샴페인 하우스는 오로지 모엣 하우스 (Moet Maison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뿐이었다고 하는데, 이 길이 글쎄 아주 기가 막힌 노른자 땅이었다. 이 길을 통해 파리 ( Paris)를 관통하여 스트라스부르그 (Strasbourg) 지역인 독일 국경까지 이어지는 중요 도로가 되었다고 한다. 루이 16세가 1791년에 프랑스혁명당시 이 길을 통해 도망을 쳤고, 나폴레옹이 폴란드와 러시아를 치러 떠난 전쟁길이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그 당시 꽤나 여러 번 모엣 하우스를 방문을 했다고 한다. 장-레미와 처음 만나 샴페인을 마신 그 방은 아직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가보지 못했다.
모엣 샹동에서는 아쉽지만 돔 페리뇽의 동상만 보고 그냥 패스했다. 투어를 예약을 하지 않아 테이스팅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짧은 방문의 목적지는 페리에 쥬엣 ( Perrier Jouet)이다. 페리에 쥬엣의 샤토는 화려함의 극치다. 박물관으로 쓰는 메인 빌딩에 들어갈 시간은 없었으나 맞은편의 와인바는 예약 없이 들어가 샴페인 맛을 볼 수 있었다. 정원에 마련된 테이블은 푸른 식물들과 편안한 의자와 테이블의 세팅으로 이국적인 매력이 가득하다. 지나가는 이들을 매혹시키는 정원이다. 우리는 간단한 안주와 샴페인 한잔을 천천히 마시고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드디어 4시간의 긴 여행이 시작된다. 벨기에의 브뤼헤로 향했다. 가는 길에 릴르 ( Lille))라는 프랑스 서북부 끝의 도시에 잠깐 들러 보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냥 대 도시였다. 복잡한 릴르를 서둘러 빠져나와 다시 브뤼헤를 향해 달렸다. 해가 긴 여름날이라 7시경 브뤼헤에 도착했을 때 대낮처럼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