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가 놓아둔 지 오래된 글을 꺼내 들었지만 이어 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의 회로가 적절하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기억하고 있는 실체가 진짜인지 허상인지 혼란스럽다. 사람을 상대로 한 기억일수록 심리적 상태의 진위가 더욱 의심스럽다. 시간이 기억의 생생함을 희석시키기 때문이다. 이어 쓰기를 포기하고 줄을 바꿔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유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사랑한다고 말을 꺼냈던 날 나는 유난히 풀이 죽었었다. 알 수 없는 무기력을 깨달았다. 지키고 있던 자존감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내가 아닌 네가 전부인 세계로 연결된다는 것은 낯설고 무서웠다. 세계가 바뀐다는 건 알고 있던 세상의 멸망이었다. 내가 지키고 있던 세상이 사라지고 네가 열어준 새로운 우주가 블랙홀 같이 나를 끌어들였다. 그런 세상과 이어준 사람은 기억의 시간이 무수히 지났어도 옅어지지 않는다. 지금 어디에 있건 없건 상관없이 가슴살을 파고 새겨져 있는 너의 잔해가 실핏줄을 타고 온몸에 퍼져있다. 사랑이 한 사람의 생을 전혀 다른 세계의 번성함에 포함시킨다. 너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자마자 감정의 회로들이 가동을 시작한다. 의기소침해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얽혀 들어 이어 쓰기가 가능해진다. 너의 세계가 나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고 마지막 문장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