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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작 Apr 24. 2022

네게 왔던 날, 비 오던 날

정우와 지하

기분이 좋을 정도로 시원하고 차갑게 비가 내리던 날, 정우는 저 멀리서 그 아이가 뛰어오던 잔상을 기억한다. 정우는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고, 그는 꼭 5분씩은 여상하게 늦곤 했으니 그날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우산도 쓰지 않고 전력으로 달려와 기어이 앞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헉헉, 몰아쉬는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도 그날의 모든 것이 정우의 머릿속에 그대로 박혔다. 마치 필름처럼.


"정말 미안. 길목을 잘못 들어서…!"


지하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집에서 나올 적에는 완벽하게 말려 둥그런 컬감이 살아있었을 머리가 이 미친 물줄기에 폭삭 주저앉았다.


"오래 기다렸지…. 비도 이렇게 오는데 어디 들어가 있지 그랬어."


아무 말도 않고 지하를 빤히 올려다 보았던 것 같다. 정우는 자신의 눈빛이 어땠는지는 저가 비친 지하의 눈동자 속에서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어깨가 움찔, 흔들리고 눈동자가 슬쩍, 갈 데를 잃었다. 그래, 나는 화를 내는 거다. 서늘한 날씨에 온몸으로 비를 맞은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오늘은 정말 안 늦으려고 했는데."

"…."

"… 정우야, 무슨 말이라도 해줘."

"왜?"

"응?"

"맨날 늦었잖아. 왜 오늘은, 인데?"


특별할 것 없는 날이었다. 둘 중 하나의 생일도, 축하할 어떤 날도 아니었다. 어제, 그제와 다른 점이라면 오늘은 비가 왔다는 것 뿐이었다.


"… 비가 오니까."


그런데 그 애는 그게 이유라고 한다.

 

"비가 더 세질까 봐. 너 젖는 거 싫어하니까."


힘 빠진 목소리가 뻣뻣하게 긴장된 정우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희한했다.

학교가 끝난 지는 이미 한참 되었다. 정우는 수업 후 항상 학교 도서관에 남았다. 구석 자리에 앉아 두 시간 정도 책을 읽고 나면 창문 밖에 보이는 하늘은 어느새 붉은빛이곤 했다. 조회대 아래에 앉아 축구하는 애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옆자리에 지하가 슬그머니 들어오곤 했다. 또 늦었네. 하하. 멋쩍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오늘은 비 때문에 하늘은 붉지 않고 잿빛이었으며 축구하던 아이들도 일찍 집으로 가버렸다. 정우는 조회대가 아닌 현관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크게 눈에 띄는 법이 없고 말수도 적은 정우는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혼자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정우에게 '옆집 사는', '능글맞고 잘생긴 애'가 하루는 우유, 하루는 빵을 가져다주며 옆에서 알짱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섞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우의 옆자리는 지하의 것이 되었다.


정우를 찾아오고, 정우에게 웃어주고, 정우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지하 뿐이었다.


"화내지 마, 정우야."


젖은 손이 늘어진 가방끈을 슬며시 잡았다. 어서 집에 가자. 교묘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툭. 가방끈을 만지작 대던 손가락이, 손끝이 정우의 팔에 닿았다. 차가운 면에 따뜻한 점이 느껴졌다.


"차가워."

"응."

"저리 가."

"… 싫어."

"젖잖아."

"어차피 집 가는 길에 다 젖어."


아까는 내가 젖는 거 싫어하네, 어쩌네 하더니. 정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하는 제 손가락에서 떨어져나간 물방울이 정우의 흰 팔에 달라붙어 미끌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마저 유정우, 이 아이 같았다.

갈색 머리칼, 갈색 눈동자, 감정 표현이 적은 얼굴. 제가 어울려 다니는 다른 친구들은 일상으로 쓰는 거친 말도 일절 하지 않고, 늘 단정한 몸짓에 조용에 말투. 모든 것이 자신과 달랐다. 어쩌다 길에서 한 번, 동네 도서관에서 두 번, 마트에서 세 번, 그렇게 마주치다 보니 자연히 눈길이 갔다. 자신감 넘치고 활발한 이지하가 유정우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친구라고 말한 적 없다. 친구가 되지 않을 거다. 누가 친구에게 이래.


지하의 시선이 정우의 팔을 타고 어깨, 목, 턱으로 올라왔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조금 으슬한지 정우의 입술은 색이 없었다. 뛰어오느라, 숨을 고르느라, 초조함을 숨기느라 깨물어댔던 제 입술과는 다른 색일 것이다.

지하가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이 학교 현관이 서있다는 것도, 유정우와 이지하는 열여섯 살 남자애라는 것도, 아직 고백도 무엇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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