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영화를 좋아했다. 엄마가 아픈 시기 동안 집을 떠나 만들었던 그 졸업 영화는 언제 완성이 되는지 늘 궁금해했다. 나의 영화는 늙은 할머니가 텅 빈 집에 홀로 있게 만들었고, 그녀를 외롭게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난 그 영화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두 번째 영화는 순심, 그녀에 대한 영화이다.
순심에 대한 영화를 찍을수록 나의 할머니는 사라졌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젠 더욱 모르겠다. 하나의 명확한 진실로 규정될 수 없다. 할머니에 대한 나의 기억은 다른 이들의 기억과 겹쳐져 변형되고 왜곡된다. 더불어 사람들은 다 저마다 다른 진술을 한다. 그리고 그 진술이 항상 일치하진 않는다. 영화를 찍으며 계속해서 질문들이 생겨나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할머니는 왜 순천 큰아들 집을 떠나 작은아들 집, 곧 나와 함께 살게 되었는가?
1997년 당시 교사가 아닌 행정직 공무원은 육아휴직이 없었다. 엄마는 출산 후 얼마 되지 않아 복직해야 했다. 우리 할머니가 큰아들 집을 떠나 작은아들인 우리 아빠와 함께 살게 된 데에는, 언니와 나를 돌보는 대외적 명분이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언니와 나를 어린이집에 가는 네 살 전까지 “수정이 이모네 할머니”에게 맡겼다. 수정이 이모는 엄마가 교회에서 만난 동생으로 우리 집 인근 “강남아파트”에 동생들과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강남아파트는 지금은 재개발로 철거된 15평의 연탄불을 떼는 좁고 낡은 아파트였다. 그곳에 성인이 된 딸들 세 명과 은퇴하신 부모님까지 다섯이 살았고, 우린 마침 그 딸들의 조카이자 노부부의 손녀처럼 그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수정이 이모네 할머니는 날 바닥에 눕히지 않고 당신의 배 위에 눕혀 낮잠을 재웠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어렴풋한 따뜻함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보통은 엄마 아빠의 출근 시간에 맞춰 할머니가 언니와 날 데리러 오셨는데, 하루는 일정 때문에 늦게 오셔서 어쩔 수 없이 엄마 아빠가 자는 우리만 집에 두고 출근해야 했다. 당시 언니는 네살 나는 두살이었다. 잠에서 깬 내가 엄마를 찾으며 울자 언니는 울지 말라며 나를 때렸다. 그러자 내가 더 크게 울었고 결국 자기도 같이 옆에서 울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루는 아빠가 퇴근 후 수정이 이모네에 날 데리러 왔는데, 두 돌이 막 지난 내가 “아빠!” 하며 현관으로 달려가다 순간 멈춰서 바닥만 발로 벅벅 긁었다고 한다. 이건 나도 기억난다. 하루 종일 할머니 할아버지가 날 예뻐해주고 돌봐줬는데, 아빠가 왔다고 바로 달려가는 건 배신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있는 거실과 아빠가 있는 현관 사이 화장실 문 앞에서 바닥만 보고 서 있었다. 이날 아빠는 할머니에게 전화했다.
“엄마, 올라와서 우리 애들 좀 돌봐줘. 애들이 너무 불쌍해. 소현이가 벌써부터 눈치를 봐. ”
엄마는 아빠가 할머니에게 전화했다는 사실은 지금껏 몰랐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자 엄마는 순천에서 큰아빠와 살고 있던 할머니, 곧 자신의 시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어머니 올라오셔서 저희 집 애들 좀 봐주세요.”
할머니는 단칼에 엄마의 부탁을 거절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큰아들 곁이라며 그곳을 떠날 수 없다고 하셨다. 엄마는 그 단호함에 ‘아! 저분은 결코 작은아들 집으로 오시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어느날 할머니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가 그 집에 가서 살아도 되겠냐.”
엄마는 할머니의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일단 올라오시라고, 좋을지 나쁠진 모르지만 한번 함께 살아보자고 했다.
고모는 할머니가 자신도 도시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서, 순천에서 밭일하고 아들 며느리 내외와 싸우면서 사는 게 지긋지긋해서 작은아들 집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할머니는 큰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고모의 증언에 의하면 할머니의 큰아들에 대한 사랑은 병적이었고, 큰며느리를 못마땅해했다. 큰엄마는 시내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결혼 전까지 밭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루는 할머니와 큰아빠가 땡볕에 밭일을 하다 목이 말라 큰엄마에게 새참을 갖다 달라 했다. 큰엄마는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한 손에 주전자를 다른 한 손엔 어린 딸 손을 잡고 밭에 와 당신의 딸을 세워두곤 연신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와 큰엄마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사람이었던 거다.
'순심이 가장 사랑한 사람은?'
영화의 처음 지어진 제목은 <순심이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다. 고모와 아빠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자기 큰아들, 큰아빠를 가장 사랑했다. 가난한 사대 독자 소작농의 집에 시집을 갔던 순심은 지독한 시집살이를 견뎌야 했다. 첫째 딸, 곧 나의 고모를 낳았더니 시어머니의 구박이 더 심해졌고, 그 후 첫 아들, 곧 큰아빠를 낳았더니 그제야 사람 대접을 해줬다고 한다. 고모는 아무리 제 자식 이어도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존재를 할머니가 무의식중에 밀어내고 미워했을 거라고 말했다.
우리 아빠는 아주 오랫동안 차남 콤플렉스를 지니고 살았다. 청소년기엔 터프한 형과 달리 내성적인 자신의 성경이 싫어 일부러 술.담배를 하며 방황을 했다고 한다. 오십이 넘어서까지 자신의 어미가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도 항상 할머니의 사랑을 의심했다. 하루는 집에 가사도우미를 불렀는데, 할머니가 우울증이 와 버렸다. 자기는 이 집에 밥과 빨래하러 왔는데, 이제 자신은 이 집에서 무슨 의미냐며 한탄했다. 아빠는 왜 아들 집에서 식모처럼 살려 하냐며, 자기가 큰아들이 아니라 그런 거냐며 자신의 늙은 어미에게 성을 냈다.
할머니는 어린시절 내게 고모와 아빠는 얌전하고 꼼꼼하고, 큰아빠는 덜렁거린다고 했다. 똑같이 옷을 입혀보내도 고모와 아빠는 깔끔한데, 큰아빠는 여기 저기 묻히고, 흘리고 다녔다고 한다. 내가 처음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된 다섯살부터, 마지막해인 스물네살까지, 할머니는 고모를 대학에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고모를 대학에만 보냈어도, 큰일을 했을 텐데, 그 똑똑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며 한탄했다.
영화의 제목을 고민하던 중 순천으로 촬영을 나갔다. 순천 식구들은 본 영화의 제목을 궁금해 했고, 난 “순심이 가장 사랑한 사람”으로 지을까 고민중이라 말했다. 그러자 작은할머니는 단번에 “너잖아!” 라며 날 가리켰다. 사실 대외적으로 할머니가 제일 이뻐했던 손주는 큰아빠의 막내아들 회민 이었다. 할머니는 명절때면 회민이가 좋아한다며 김치만두를 오백 개씩 빚었다. 그 과정에 언니들과 나도 매번 동원 되었다. 직업군인인 오빠가 종종 우리집에 찾아보면 할머니는 이것저것 진수성찬을 잔뜩 차렸다. 할머니는 회민을 늘 안쓰러워했다. 어릴 때 헤어져서 짠하다고 했다.
영화를 만들며, 순심의 손주들, 곧 나의 사촌 언니, 오빠들에게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를 물었다. 울진에서 군복무를 하던 회민오빠는 손주 중 가장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났다.
죽음 앞에 쓰러져 누워있는 할머니에게 회민 오빠는 물었다.
“할머니, 나 회민이여. 알아보겠는가”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칠순 때, 우리 같이 중국간거 기억 나는가”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팔순 때, 제주도 간 건 기억 나는가”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할머니는 참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야. 모든 자식 손주들이 할머니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 ”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눈물을 주륵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사촌오빠, 언니들을 인터뷰 하며 자식들과 달리 손주들은 다 저마다 할머니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는 걸 발견했다. 할머니가 제일 예뻐했던 손주가 누군지 보다도, 그 자신의 개별적인 기억이 그 관계를 특별하게 했다. 할머니는 고모의 자식도, 큰아빠의 자식도, 우리 아빠의 자식도 돌보았다. 모든 손자 손녀는 그녀와 함께 살며 그녀의 사랑을 받은 기억을 간직한다.
난 놀랐다. 할머니를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 회민 오빠가 꺼낸 기억이 할머니 칠순과 팔순 때, 가족 모두 다같이 놀러간 여행 이었다는 게. 사실 내게 그 중국 여행과 제주도 여행은, 나와 할머니가 함께한 수많은 시간 중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난 그제야 할머니의 말을 또렷이 이해 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떼어 놓고 와서 짠하다는 그 말은 내 마음이 되었다.
할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회민은 내게 말했다. 자기 사실 다 기억하고 있다며. 할머니가 분당으로 올라가는 날 짐을 싸 들고 나서는데, 오빠는 울면서 할머니를 쫓아갔다고 한다. 할머니 가지 말고 우리랑 같이 살자며 한참을 그렇게 따라 갔는데, 할머니는 뒤도 안돌아보고 걸어 갔다고 한다. 회민이 크고 나서 종종 할머니는 그날에 대해 사과했다. 그럴때면 회민은 항상 너무 어릴 때라 다 까먹었다고 했는데, 사실 너무 생생히 기억 난다고, 그날 너무 슬펐다며 그는 내게 말했다.
어떤 이야기는 깊은 침묵 이후에야 꺼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