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내게 시계 보는 방법과 한글을 알려줬다. 곧 그녀는 나의 세계에 선형적 시간관과 약속된 언어기호를 새겨 넣은 사람이다. 어릴 적 내 기억 속 할머니는 방에서 성경을 쓰곤 했다. 그런 할머니가 책을 읽을 정도의 문해력이 없다는 것, 사람들 앞에서 제 이름 석자도 쓰지 못하는 실질적 문맹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성인이 된 이후이다.
할머니는 성남시에서 노인복지로 추진한 노인 일자리 사업을 통해 월 십사만 원여를 벌고 있었다. 형광 조끼를 입고 길거리 쓰레기를 줍거나, 초등학교 운동장에 앉아 이탈하는 아이들이 있는지 지켜보는 등 소소한 일거리를 통해 노인들에게 사회적 기여감을 주는 제도였다. 그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매달 일지를 써서 내야 하는데, 큰 건 아니고 자신이 활동한 날짜를 쓰고, 그 옆에 본인 서명을 하는 거였다. 단순히 날짜를 쓰고 서명하는 간단한 서류인데. 성경을 그리 써대던 할머니는 그 얄팍한 종이를 들고 보통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바쁘면 손녀에게 부탁하곤 했다. 할머니가 적은 돈 때문에 일 하는 게 좋지만은 않았던 터라 난 순순히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그 일로 기어코 짜증을 왕창 내곤 했다.
처음엔 “이거 그냥 할머니가 하면 돼!” 라며 당연하다는 듯 종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민망한 표정으로 내게 재차 부탁하는 그녀를 보고 나서야 그녀가 글을 쓰지 못한다는 걸, 그 작은 칸에 서명할 솜씨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내게 한글을 가르쳤던 사람이 실은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 성경을 쓰기보단 그리고 있었다는 것. 띄엄띄엄 글자는 읽지만 결코 책 한 권 읽지 못했다는 그 모든 게 할머니라는 사람, 내게 가장 가까운 타인이었던 그 사람, 그녀에 대해 난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나의 할머니 서순심은 일제강점기 시절 국민학교를 다녔다. 할머니는 칼을 찬 일본 선생님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얘기해주곤 했다. 당시 국민학교 학예회 때 할머니 친언니가 주인공을 맡아 연극을 하게 됐는데, 주인공 치고 옷을 초라하게 입고 갔다고 한다. 그러자 그 옷을 보고 담임 선생님이 혼을 냈고, 그날 이후 언니는 학교에 가기 싫다며 학업을 그만뒀다고 한다. 자신의 언니가 학교에 가지 않자 할머니 자신도 덩달아 학교를 그만뒀다. 당시엔 여자애가 기어코 배우겠다 학교에 가는 게 욕심으로 비춰져 지탄의 대상이 됐다고 한다. 그렇게 할머니는 국민학교 중퇴가 최종학력이 되었고, 난 그런 할머니의 돌봄으로 학업을 이어 갔다.
손녀에게 한글을 가르칠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을 글을 쓰지 못했던 여성. 손녀가 정규교육 과정을 누구보다 오롯이 밟고 그 이후의 과정까지도 매진할 수 있도록 헌신했던 여성.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잘 모르겠다. 그럴수록 난 할머니 자신이 말했던 그 말들을 떠올려 본다. 할머니의 말은 분명 내 몸에 새겨져 나의 언어로 발현된다.
할머니는 내게 누구보다도 배움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엄마도 안 하는 공부 하라는 잔소리, 엄마도 안 묻는 성적을 과목별로 일일이 확인하던 그런 할머니였다. 시험 날이면 외출도 안 하고 집에서 날 기다렸다 과목별로 몇 개 틀렸는지 조목조목 묻곤 했다. 몇 점이 아니라 몇 개 틀렸냐를 묻는다는 건 할머니의 기본값이 만점이었음을 뜻한다. 내가 한 두어 개 틀렸다고 말하면, 초등학교도 미처 마치지 못한 그녀는 선생님이 다 알려준 범위 내에서 문제가 나오는데 백점을 못 맞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며 나를 타박했다.
성적을 들은 할머니는 자기 친구 문태성에게 전화를 걸어 그 집 손녀는 몇 점이나 받았는지를 물었다. 난 무조건 문태성 할머니의 손녀딸보다 한 개라도 더 맞았어야 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경우 내가 더 시험을 잘 봤는데, 내가 하나라도 더 맞았다는 그 사실에 날 타박하던 할머니는 이내 날 칭찬하며 격려해 줬다. 문태성 할머니는 젊은 시절 초등학교 교편에 있었던 그 당시 배운 여성이었다. 함께 사는 딸은 고등학교 선생, 사위는 교수, 손자는 카이스트 학생, 손녀는 나랑 동갑인 같은 중학교 여자애였는데. 지금 글을 쓰면서 보니 집 크기부터 자식 내외 직업까지, 우리 할머니가 내세울 만한 건 오직 나밖에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생 때 모교로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당시 국어 선생님이 날 알아보시곤 할머니 안부를 물으셨다. 고등학교 삼 학년 때 매일 엄마가 아침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하루는 그 도시락 가방을 집에 두고 갔다. 그걸 본 할머니는 손녀딸이 아침을 굶게 될 걱정에 무작정 버스를 타고 학교로 찾아왔다. 나의 모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건물, 공연장, 실기동 등 여러 건물로 이뤄진 복잡한 구조라 처음 온 외부인은 목적지를 찾기 쉽지 않다. 학교에 처음 와 본 할머니는 한참을 이 건물 저 건물 헤매다 교무실로 들어갔고, 당시 내 담임도 아니었던 그 국어 선생님께서 땀이 범벅이 된 할머니에게 그 도시락 가방을 받아 교실에 있던 내게 전해주셨다. 그 도시락을 받았을 땐 이미 삼 교시가 다 끝나 점심시간이 임박한 때였다.
나의 학업은 할머니의 돌봄 위에 지속돼 왔다. 그러나 할머니는 정작 자신의 글 한 줄 남기지 못했다. 순천으로 내려가는 날 아침, 할머니는 내게 흰 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는 당신이 모은 돈이 잔뜩 들어있었다. 꾸깃꾸깃하고 두툼한 그 봉투 위에 흔들리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소연아 사랑한다’
그 봉투는 여러모로 내게 놀라움이었다. 할머니는 평소 내게, 자식 손주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이름은 소연이 아닌 ‘소현’이다! 봉투를 건네받고 할머니에게 내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할머니는 “박소현” 이름 세 글자를 또렷이 말했다. 그러며 발음 나는 대로 썼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은 할머니가 내게 준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엄마는 내용물 없는 그 봉투를 고민 없이 버렸다.
난 그녀의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는 마음에 휩싸였다. 먼저는 에세이 형식으로 작성했다. 할머니의 장례 이후에는 실제 있었던 상황들과 가족들이 내뱉은 말들을 기반해 시나리오를 썼다. 왜 그런 마음에 휩싸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흥미를 넘어선 의무마저 들었고 그 속에서 무엇보다 주체적인 충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