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시타델> 시즌1
[해당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원치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착한 거짓말이라는 모순
아이가 책을 읽다가 나에게 '착한 거짓말'이 뭐냐고 질문했다.
엄마, 거짓말은 나쁜 거잖아.
근데 거짓말이 왜 착해?
착한 거짓말이라는 게 있어?
책에서 어떤 장면 중에 나온 말이냐고 물었고 아이의 설명을 듣고선 그 상황에서 작가가 말한 착한 거짓말이 어떤 걸 뜻하는지 풀이해서 얘기해 줬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됐는지 고개를 끄덕이고선 다시 책을 읽어갔다.
내 설명을 듣던 신랑과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다가 부부 사이의 솔직함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부부 사이에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까? 다 말하는 솔직함이 과연 좋은 걸까?
배우자에게 한치의 거짓도 없이 늘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좋은지, 불필요한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고 감추는 게 나은지, 그렇다면 어디까지 감추고 어디까지 말해도 좋은지에 대해 꽤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난 당연히 부부 사이에는 감추는 것 없이 다 공유하는 게 좋다고 말했고, 그는 굳이 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지혜로울 때가 있다고 설득했다. 평소처럼 내 주장에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그가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자 왠지 모르게 뾰로통해졌다.
# 진실을 알기 두려웠어 vs 네가 물어봤다면 솔직하게 말했을 거야
아마존 프라임에서 선보인 미드 <시타델>은 독립적인 국제 첩보국 '시타델'과 시타델을 파괴하고자 하는 연합체 '멘티코어'의 충돌 속에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마블의 영광을 이뤘던 루소 형제가 제작에 참여한 작품이라길래 믿고 보는 마음으로 고민 없이 플레이를 눌렀다. 요새 워낙 예고편만 그럴싸하고 막상 보면 허술한 작품들이 많아 실망한 적이 종종 있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재밌게 본 작품에 속한다. 다만 시즌1이 끝난 이후를 어떻게 이어갈지 궁금하던 찰나 곧 공개된다는 <시타델> 시즌2 기사가 떠서 반가운 마음에 찾아봤더니 주인공도 바뀌고 전혀 다른 인물의 이야기가 나오는 듯해서 아쉬웠다. 그래도 궁금한 맘에 보고 싶어 졌다.
시타델 시즌1의 주인공 '메이슨 케인'과 '나디아 신'은 스파이 커플로 첩보원답게 매일 새로운 신분과 환경 속에서 진실과 거짓에 뒤섞여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한다. 서로 사랑에 빠지는 사이 여러 사건들에 얽혀 기억을 잃은 채로 살아가다가 옛 기억을 되살려 다시 만나게 되는데. 각자 숨겨야 하는 진실 때문에 서로를 믿어야 하는지 의심하고 계속 감추고 들키는 에피소드들이 화려한 액션, 반전 서사와 함께 숨 막히게 전개된다.
메이슨이 나디아에게 "네가 거짓말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어.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너무 두려웠으니까."라고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들은 나디아는 "차라리 솔직하게 물어보지 그랬어. 그랬다면 진실을 말해줬을 거야."라 말하고 떠난다.
주인공들은 에피소드 내내 진실에 대한 고민을 거듭한다.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도 사랑에 빠지면 빠질수록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서로에게 과연 진실을 말해도 될까, 말하려면 언제 말하는 게 좋을까,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물어보는 것 같았다.
# 판도라의 상자를 굳이 열어야만 하나
기혼자들 사이에 종종 회자되는 '배우자의 과거'는 늘 뜨거운 감자다. 결혼 전에 몇 명을 만났는지, 누굴 만났는지, 그 사람은 어땠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는 이제 다 지난 과거의 일들이고 부부 사이니까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래도 굳이 알아서 좋을 것 없는 것들이니 기억 저편에 묻어두는 게 낫다고 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굳이 열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며.
신랑과 나는 운 좋게도 서로가 20대가 되어 사귄 첫 여자친구, 남자친구였고 그대로 7년간 연애한 뒤 결혼에 골인한 커플이었기에 과거의 연애 상대 자체가 없다. 오히려 사귀기 전 신랑이 어설픈 질투 작전을 펼치고자 고등학교 때 본인이 오래 좋아했던 첫사랑 얘기를 열심히 해주며 그녀의 증명사진까지 간직하고 있던 걸 걸렸을 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굳이 열고 싶지 않았던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는 나에게 오롯한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의 올바른 정직함보단 눈치와 센스가 없음에 불평했고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까지 알려주는 열심 어린 어리석음에 혼자 짜증이 났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늘 진실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날 그 진실은 나에게 신뢰가 아닌 불쾌감만 주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때 그 사건 이후 그는 '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말하는 게 꼭 정답만은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부부사이에도 굳이 다 말하지 않는 게 지혜로울 게 있다고 말했구나 싶어 민망한 웃음이 난다.
# 결국은 사랑을 넘어선 신뢰의 문제
내가 나디아라면 사랑하는 메이슨에게 모든 진실을 말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들이 부부 사이는 아니었지만 메이슨이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만큼 깊은 관계였다. 나디아도 나름의 이유 때문에 '착한 거짓말'을 해야만 했지만 어쨌든 진실이 아닌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메이슨은 그녀의 거짓말을 알았음에도 오히려 더 캐내기를 거부했다. 그가 후반부 거대한 거짓말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어찌 보면 그녀 때문에 시작된 '착한 거짓말'이었다. 둘 다 단순히 진실만을 쫓아 서로에게 진실을 말했다면 예상치 못한 나쁜 결과를 감당해야만 했을 것이다. 결국 내가 나디아였어도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했다는 뻔하디 뻔한 말을 해야만 했을 거다.
그렇다면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착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용서할 수 있을까. 지금 잠깐 드는 짧은 생각으로는 내 영혼을 깨부수는 불륜의 문제나 가정 경제를 위협하는 심각한 보증의 문제가 아니라면 대략 그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싶어 넘어갈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착한 거짓말은 손에 꼽힐만큼 희귀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착한 거짓말이라도 그 빈도가 심하면 그건 그냥 거짓이 된다.
우리 부부의 모습을 빗대어 볼 때, 서로 어느 선까지 오픈할 지에 대한 것도 시시콜콜 이건 말하고 저건 감추자 정하기보다는 암묵적인 룰처럼 신뢰를 바탕으로 자연스레 정해진다. 심지어 사실이 아닌 거짓임에도 그냥 넘어갈 수 있다는 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또한 철저히 믿기 때문이다.
사랑은 믿음을 바탕으로 쌓아진 감정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시작할 때 그 끝은 스스로를 갉아먹고 둘의 관계를 해치는 파국일 뿐이다. 진실과 거짓 여부를 냉철하게 따지는 게 오히려 어리석을 때도 있다. 대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평소 서로에게 충분히 정직한 신뢰가 촘촘히 쌓였을 때에야 비로소 허용되는 일이라는 점이다. 사랑하는데 진실이든 거짓이든 무슨 상관이야 라는 식의 단순한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나쁜 진실보다 착한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에 공감하며 굳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는 성숙한 관계를 이어가도록 부부간 뜨거운 신뢰를 매일 차곡차곡 쌓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