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원치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누가 물을 돈 주고 사 먹어?
과거엔 집에서 커다란 주전자에 보리차나 둥굴레차를 직접 끓여 먹는 게 일반적이라 '물을 사 먹는다'는 생각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할머니의 할머니 시절엔 산속 계곡물을 시원한 약수처럼 마셨다.
나도 생수 제품 출시에 대한 뉴스를 보며 누가 물을 돈 주고 사 먹냐고 반문할 정도로 믿기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점점 생수 시장은 성장했고 지금은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페트병에 담긴 물을 사 먹는 게 매우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다.
나중에는 시원한 물을 사 먹듯 신선한 공기를 사서 마시는 미래가 올 거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그런 우리 부부의 말을 듣고 피식 비웃었다.
"에이, 엄마 공기를 누가 돈 주고 사요."
그래, 내가 수년 전 물을 보던 시각과 똑같구나 너희도.
# 우주에서 '물'은 곧 생존이요 권력이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방영 중인 미드 <익스팬스>는 SF원작소설을 기반으로 시즌6까지 나올 정도의 꽤 탄탄한 스토리와 두터운 팬층을 갖고 있다.
200년 후의 미래 시점 태양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물과 공기가 풍부한 지구는 우주 내 가장 강력한 세력이며 타행성이나 소행성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자원을 착취한다. 지구 외에도 화성, 벨트, 외곽 식민지 등은 각각의 목표와 갈등 속에서 서로 얽혀 있다는 설정이다.
지구는 자원의 최대 소비국이자 정치적 강대국이며, 화성은 지구로부터 독립해 자신들의 자원을 억척스럽게 개발하면서 군사적으로 발전한 사회이고, 벨트는 지구와 화성의 착취를 받는 자원 공급지로 그려진다.
개인적으로 작품 속에서 나오는 '물'에 대한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생각할 거리를 갖게 됐다.
작품 속 배경인 우주에서 물의 부족은 생존의 위협을 뜻하기 때문에 물의 분배와 통제는 정치적 권력이 될 수밖에 없다.
물의 통제권을 가진 자가 권력을 쥐게 되고 이에 따른 계층 간의 격차와 갈등이 발생한다. 그래서 주요 세력들은 물을 무기화하거나 거래수단으로 삼아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한다.
결국 이 작품 속에선 우리네 현실세계에서의 돈처럼 '물'이 곧 생존이자 권력의 상징인 셈이다.
세면대와 샤워기를 틀면 언제나 콸콸 쏟아지는 깨끗한 물, 정수기에 컵만 갖다 대면 나오는 정수-온수-냉수, 물을 뿌려대는 흠뻑쇼 행사에 워터파크 시설, 수영장들까지. 내 주변 속 물들을 떠올려보니 이 정도 조건 정도면 영화 속 벨트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호사스럽다 여길 수준이었다.
# 물을 물로 보지 말자
작품 속 에피소드들을 보며 우리가 지구에서 살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햇빛, 바람, 물, 공기와 같은 환경들이 어떤 면에서는 엄청난 축복이자 놀라운 조건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태양계, 우주라는 공간 속 지구라는 행성에 살며 너무 흔해서 고마움을 모르는 이토록 완벽하고 풍부한 요소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될까.
익스팬스(expanse)는 영어로 '확장' 또는 '팽창'이라는 뜻인데 인류가 지구를 넘어 화성, 소행성, 외곽 행성들에게까지 세력을 확장해 식민지화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의미 있는 제목이다.
우주 내 세력 확장을 위해 가장 필요한 자원 중 하나인 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지구의 무감각함과 늘 물이 부족해 물을 얻기 위해 싸우는 벨트 사람들의 모습이 대조돼 씁쓸했다.
더불어 나도 복에 겨운 요소들을 누리며 너무 소홀히, 당연히 대한 것은 없었나 되돌아봤다.
눈 떠서 잠들 때까지 매 순간 엄마를 찾는 아이들의 투정, 정리하고 청소할 것들이 보이는 집안 공간들, 냉파를 기다리는 냉장고 속 숨겨진 다양한 식재료들.. 투덜대고 싶은 현실도 조금만 비틀어보면 감사할 것뿐인데 늘 알면서도 또 그새 잊게 된다.
미래를 그려내는 SF 미드를 통해 현실에서의 삶을 점검하기까지 나의 인사이트가 이렇게 expanse 하게 되다니. 역시 최첨단 미래 기술 시대 속에서도 사소한 것의 소중함은 변함없이 통한다고 되뇌었다.
또한 정수기에서 손쉽게 나오는 시원한 얼음물 한잔에 유난스레 감사하며 오늘도 물을 물로 보지 않는 작은 겸손함을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