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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레이첼 Oct 23. 2024

나야, 인공지능

영화 <그녀>(Her)

[해당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원치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하이 빅스비 오늘 날씨 알려줘


매일 아침 모닝콜 알람을 끈 뒤 눈을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하이 빅스비! 오늘 날씨 알려줘"라고 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면 빅스비는 친절한 목소리로 현재기온, 최고최저기온, 미세먼지 상태를 알려주며 비가 올 테니 우산을 챙기라는 둥, 아침 바람이 쌀쌀하니 겉옷을 입으라는 둥의 세심한 코멘트까지 더해 날씨 정보를 전달한다. 난 빅스비의 날씨 정보를 바탕으로 아이들의 옷을 챙겨 입히고 그날의 일상을 체크한다.


비단 어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시리야! 빅스비!"를 외치는 것에 익숙하고 랩을 해달라고 하거나 같이 게임을 하자고 말하며 놀기도 한다. 일상 속 궁금한 것들이나 업무 처리에 필요한 정보들을 chatGPT에게 물어보며 학습시킬 수 있고 꽤 수준 높은 외국어 회화 연습까지 할 수 있다. 앞으로 더 많은 기술의 발전이 무궁무진하겠지만 이미 현대 생활 곳곳에서 인공지능과 디지털기술은 꽤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2014년 개봉작인 영화 <그녀>는 10년 전 작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세련됐다. 마치 미래를 예언하는 듯한 인공지능기술과 소셜미디어, 디지털시대의 특징들이 생생하게 그대로 녹아들어 있어서 오히려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대로 실현가능할 것 같은 현실적인 느낌마저 들 정도다.


개인적으론 인공지능 AI와 사랑에 빠진다는 스토리 자체에 대해 반감이 심해서 처음에 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좀 꺼려졌다. 고도의 기술 발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괴한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야기 일까 봐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명작이라는 얘길 듣고 보고 싶어 하는 신랑의 추천에 이끌려 영화를 봤는데 기대 이상의 울림이 있었다.



# 어딘가 진짜 있을 것만 같은 그녀


주인공 '테오도르'가 왜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를 함께 고민하면서 나도 모르게 테오도르의 시선으로, 테오도르의 앞주머니 속 인공지능 '사만다'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됐다.


특히 '사만다'는 인격형 인공지능서비스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물이 없고 영화 내내 목소리만 나온다. 그 목소리 연기를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유명 배우 '스칼렛 요한슨'이 맡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특별해서 듣자마자 그녀의 이미지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래서 자연스레 사만다를 스칼렛 요한슨의 이미지로 상상하며 영화 속 모든 상황에 대입하게 되는데, 이게 더욱더 인공지능인 사만다가 실제 존재하는 사람인 것만 같은 착각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어딘가에 살아있고, 직접 만날 수 없지만 분명히 진짜 있을 것만 같은 그녀. 그래서 더 애타게 보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테오토르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 준비 없이 비를 만난 것처럼


<30대 이혼남과 인공지능서비스의 SF 멜로 영화>라는 타이틀로 보자면 영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지만, 테오토르와 사만다가 마치 사랑에 빠졌다가 이별하는 일반적인 연인들처럼 그려낸 주요 장면들이 가슴을 후벼 팠다. 


서로 조심스럽게 알아가고 설레며 사랑에 빠지는 꽁냥꽁냥한 일상들. 여자가 느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서운함을 차마 표현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넘어가는 장면. 그런 여자의 서운함을 알지 못하고 무디게 넘어가버리는 어리석은 남자. 연락이 안 되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뛰어가다가 간신히 연락된 여자의 전화를 받고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남자. 그런 여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도 교감하는 사이임을 알게 됐을 때의 충격. 보통 연인 사이에서 충분히 일어날법한 모든 서사가 영화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인간 대 인간이 아닌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말이다.


 '준비 없이 비를 만난 것처럼 아무 말 못 한 채 너를 보낸 뒤에..'라는 노랫말처럼 누구에게나 이별은 갑작스럽다. 테오토르와 사만다의 이별도 이처럼 느닷없이 찾아왔다. 이별을 당하는 입장에서의 헤어짐은 갑작스럽고 당황스럽지만 함께 해온 시간들을 떠올려 곱씹어보면 조금씩 보이지 않는 균열들이 있었다. 테오토르와 사만다는 인간과 AI라는 조건을 뛰어넘는 사랑이 가능하리라 믿고 싶었지만 역시나 작은 균열들이 모아져 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와 더 가깝게 교류하고 싶어 육체적인 사랑을 꿈꾸지만 불가능한 자신의 현실을 알고 절망하는 그녀. 그녀가 인간이 아닌 AI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컴퓨터 프로그램 특성상 수많은 남자들과 교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임을 알고 허탈해하는 그. 둘의 이별 장면에 다 같이 내 일처럼 안타까워했으리라.



기술이 아닌 '관계'에 대한 이야기


테오토르와 사만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게 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더 편리해지는 세상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아날로그적인 소통과 관계가 더욱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래서 삶이 편리해질수록 한편으로 인간은 오히려 더 외로워지고 삭막해지고 소외되는 경험을 하니 말이다. 사람과의 교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렇게 하기도 전에 모든 기술이 한 발 앞서 불편함을 해소시켜 주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내야 할지 고민하게 됐다.


조금은 덜 스마트하게, 가끔은 불편하게, 혹은 클래식한 방법으로 살아가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생일에 메신저 메시지가 아닌 손 편지를 쓴다거나, 친구들과 온라인 게임을 멈추고 푸른 잔디 위에서 신나게 땀을 내며 숨차게 뛰어보기도 하고, 전자책이나 오디오 도서를 클릭하기보다 아이들과 직접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 평범한 것들이 어쩌면 찐한 사람 냄새를 풍기는 인간다운 일상을 고수하는 유일한 비법이지 않을까. 


기술의 발전과 편리에 감사하면서도 현대 사회에서 인간답게 소통하고 관계 맺는 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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