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딸부잣집 셋째 딸인 6살 막내는 가족 내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아빠, 엄마, 두 언니의 보살핌과 배려로 사랑받는 막내의 위치인지라 떼쓰고 어리광 부릴 때도 많다. 언니들도 동생이니 그러려니 받아주고 솔직히 부모인 우리도 내리사랑인지 셋 중 막내를 가장 많이 허용해 주는 편이다.
그래서 처음엔 막내의 단체 생활이 염려스럽기도 했다. 집에서처럼 친구들에게 자기 맘대로 하거나 기다리지 못하고 급한 성격 때문에 싸우면 어떡하나, 최악으론 친구를 함부로 때리면 어쩌나 은근히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유치원 담임선생님과 통화 중에 의외의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막내와 유독 친하게 노는 친구 A가 있는데 둘이 놀 때 대부분 A가 주도권을 갖는 편이고 선생님이 볼 때는 막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아도 A의 말에 따라 놀이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예를 들어 어떤 놀이를 하며 A가 막내에게 "이것 좀 들고 있어, 아냐 이렇게 해. 그렇게 말고 이렇게 해야지."라고 지시하는 모습이 잦고, 막내는 이미 흥미가 떨어지고 재미없는 놀이라도 억지로 A에게 맞춰주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고 귀띔해 주셨다.
선생님이 막내를 따로 불러서 "00야, 네가 하기 싫은 놀이면 친구한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돼."라고 몇 번이고 알려주셨지만 막내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했단다.
집에 온 막내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자기가 안 하고 싶다고 해도 A가 계속하자고 졸라서 자기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너의 마음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래도 A가 계속 계속 그렇게 할 거라고 반은 포기하듯 대답했다.
막내가 다른 일반 활동이나 기본 생활에서는 집에서처럼 잘 웃으면서 노래와 댄스를 신나게 즐기는 밝은 모습이라고 설명하셔서 그나마 안심이 됐다. 하지만 유독 A와 엮일 때면 자기표현에 서툴고 줏대 없이 끌려다니는 모습이 보이는 듯해서 부모로서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 제발 제발 하면서 데려달라고 하는데 어떡해 그럼
오늘 비슷한 상황이 둘째에게도 일어났다.
학원 끝나고 4시까지 놀다 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약속한 시간이 다 돼서는 갑자기 집에 오지 않고 같이 놀던 친구 B를 집에 데려다주고 온다고 했다. 결국 4시 30분이 넘어서 다리가 아프고 배도 고프다며 잔뜩 짜증이 난 상태로 집에 들어왔다.
B를 집에 데려다준다는 얘기를 이제까지 최소 3~4번 이상은 들었던 터라 더 이상 참지 않고 둘째를 불러 앉혔다.
오늘 앞뒤 상황을 설명해 보라고 하곤 들어보니 그 친구가 놀이터에서 놀고는 자기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해서 갔고 심지어 아파트 동입구도 아닌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이 올라가 B의 현관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오히려 둘째는 집에 돌아오는 길이 헷갈려서 혼자 이곳저곳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헤매다 늦게 들어온 거라 했다.
우리 집은 학교와 가까운 동이고 그 아이는 뒷단지 동이라 둘째는 그 친구를 데려다주러 집을 지나쳐 친구집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되돌아온 코스였다.
어쩌다가 한 번도 아니고 서로 번갈아가며 하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봐도 힘들고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동선인데 왜 매번 그랬냐고 물으니 친구한테 데려다 주기 힘들다고 말했지만 "제발 제발 제발"하며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전에도 B가 둘째에게 자기가 먹고 싶은 간식을 사달라고 아니 사 오라고 했다거나 자기 언니를 같이 기다려 달라고 하곤 언니를 만나자마자 언니랑 휙 가버려서 아이만 혼자 터덜터덜 집에 온 적도 있었던 기억 등등 별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 오늘 사건까지 듣자 하니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 네가 생각하는 '좋은 친구'는?
둘째에게 두 가지를 말했다.
첫 번째는 친구에게 자기 마음 솔직하게 표현하기. 그리고 두 번째는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기.
"친구랑 같이 놀고 어울리지만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어. 오늘 같은 상황에서 친구가 데려다 달라고 할 때 '미안하지만 엄마랑 약속한 시간이 다 돼서 안돼.' 또는 '나도 오늘 많이 걸었더니 너무 힘들어서 데려다주는 건 어려워.' 아니면 '서로 집 방향이 달라서 내가 데려다 주기엔 솔직히 너무 멀어. 우리 이제 각자 집으로 가자.'라고 너의 마음과 상황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표현해야 돼. 네 마음을 제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친구는 당연히 알 수가 없어. 네가 데려다주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다거나 좋아한다고 오해할 수 있어.
그리고 친구에게 솔직한 너의 마음을 표현했을 때 그 친구의 입장에선 좀 아쉽고 속상할 수는 있지만 '아 그렇구나. 알았어. 안녕. 잘 가. 내일 보자.' 하고 너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게 좋은 친구의 모습이라고 엄마는 생각하거든.
만약 너의 얘기를 듣고 네가 엄마와 약속 시간에 늦건 다리가 아프건 말건 상관없이 계속 자기를 데려다 달라고만 하는 친구는 어떨 것 같아?
정말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은 너를 이해해 주고 배려하는 모습이 있어.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투에서 그런 걸 느낄 수 있지.
앞으로 매번 엄마가 다 나서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알려줄 수는 없어. 이제 00 이가 스스로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좋은 친구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생각할 줄 알아야 해.그리고 너도 너의 친구들한테 어떤 친구로 행동했는지도 돌아보고."
내 얘기를 듣고 둘째는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8살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알기엔 좀 심오하고 어려운 얘기일지 몰라도 그래도 꼭 얘기해주고 싶었다.
아직 너무 어린아이들의 세계지만 좀 오버해서 그 상태의 관계가 그대로 굳어지고 성인까지 이어진다면 쉽게 정서적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원치 않는 관계에도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순응해 버리는 수동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 둘 다 성향 자체가 특별히 자기주장이 강하다기 보단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게 익숙한 편이긴 하다. 그런 부모의 유전자 영향을 받은 건지아이가 친구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여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동시에 내가 너무 아이를 통제하는 편인가 그래서 아이가 선뜻 자기 표현을 못 하는건 아닐까 혼자 마음이 복잡했다. 더 확실하게 더 강하게 자기 생각 말하는 연습을 시켰어야 했나 후회도 들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도 누군가에게 무심코 상처를 주진 않았을까 힘들게 하진 않을까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려줘야겠구나 생각했다.
어른이라면 인간관계에서의 맺고 끊는 법, 상대방이 내 기준의 선을 넘었을 때 대처법 정도는 각자알고 있다. 하지만 어른도 쉽지 않은 것들인데 아직 인생 10년 차도 채우지 못한 꼬마들에게는 여간 쉽지 않은 일이겠지.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확실히 자기만의 좋은 사람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본인 스스로 좋은 사람, 좋은 친구가 되려면 어떤 말과 행동을 보여야 할지 기준과 원칙도 세워나갈 수 있으니 결국 시간이 약이 되려나 싶다.
매번 육아 난이도가 이렇게 업그레이드된다. 나이대마다 상황마다 늘 풀어야 할 퀘스트가 주어져서 참 쉽지 않다.
그래도 옆에서 아이의 엄마로, 인생의 선배로 오늘처럼 몇 마디 조언쯤을 해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복잡 미묘한 만감이 교차해 잠든 아이들의 앞머리를 연신 쓸어 넘겼다.
아이들이 이렇게 커가는구나. 우리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조금씩 사회 속 구성원으로 들어가 다듬어질 일들이 남았구나.
그렇게 크고 작게 훈련되는 과정을 잘 통과한 뒤에는 본인에게 무리한 부탁은 정중히 거절할 줄 알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줄 알게 될 것이다.무엇보다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스스로도 그런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