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배가 아파서 깼다. 익숙한 통증에 생리대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첫째 날엔 꼭 약을 먹어야만 버틸 수 있어서 황급히 진통제를 찾았다. 분명 늘 여유 있게 구비해 뒀던 약이 한 통도 보이질 않았다. 어제 친구 유리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같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터라 얼른 약을 먹고 누워 빠른 회복을 해야만 했다. 마음은 급한데 아랫배에 통증이 심해 차마 약국까지 갈 힘이 없었다. 설상가상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리에게 방금 일어났다고, 그런데 생리통 약이 다 떨어져서 구르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유리는 곧장 "어떤 약 먹어?" 답장이 왔고, 나는 좀 버티다 괜찮아지면 얼른 약 사러 나가야겠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유리에게서 "ㅋㅋ 나 지금 약 사서 가구 있오"라 답장이 왔다. 십 분 거리도 아닌데 어떻게 그러냐고, 어떡해 어떡해 발을 동동 구르니 유리는 최근에 아파 봐서 안다며, 갈 수 있을 때 이렇게 가는 것도 좋지 않냐 그랬다. 그렇게 유리는 이른 낮부터 우리 집에 찾아왔다.
우리는 불도 켜지 않고 음악도 틀지 않은 채 빗소리를 벗 삼아 뜨끈한 들깨수제비를 나눠 먹었다. 유리는 퇴사한 뒤 입맛이 없다더니 이상하게 우리 집에 오면 밥이 잘 넘어간다 그랬다. 나는 네가 밥 잘 먹으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말하면서 순간 불을 켜야 하나 생각하던 차에, 유리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렇게 한낮의 빛이 창문 새로 들어오는 게 좋다고 말했다.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한 게 좋다, 불 켜지 말고 있자, 낮에 너희 집에 오니까 좋다. 인지하지 못했던 좋음이 가득 찼다. 생각해 보니 나 요즘은 집에 있을 때 음악을 잘 안 듣네. 글을 쓸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안 들어. 회사 다닐 때엔 한 순간도 음악이 없으면 안 됐는데. 나의 독백에 유리는, 듣지 않아도 충분한가 봐, 일부러 채우려는 노력이 필요 없어졌나 봐, 답했다. 빗소리가 말의 여백 사이사이 끼어들었다.
유리가 사다 준 약 덕택에 나는 금방 회복되었고 우리는 함께 우산을 챙긴 뒤 영화관으로 향했다. 비는 시원하게 내렸다. 쪼리에 물이 들어차도, 어깨가 조금 젖어도 좋았다. 경의중앙선이 동작구를 향할 때에 차창 너머로는 비 맞은 잎들이 스쳤고 우리는 이 평일, 이 시간에 이 풍경을 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 분명 이 순간 언젠가 회상할 것 같아, 마주 보며 웃었다.
영화는 당연지사 나의 취향이었고, 유리는 내가 좋게 봤다니 좋다고 그랬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감상을 나누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바람이 창문을 세게 때렸어도, 레몬 스콘을 시켰지만 크랜베리 스콘이 나왔어도 짜증 낼 것이 없었다. 나의 좋음이 너의 좋음이 되고 너의 좋음이 나의 좋음이 되는 것. 핑계 대거나 지체할 것 없이 서로를 원할 때 찾을 수 있는 것.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우리이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이 사실이 우리의 불안하고 흔들리던 현재를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