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26일차

by 채윤희

몸도 마음도 지쳐서 좀 쉬고 싶다고, 그래서 퇴사할 거다 이야기하면 하나같이 하던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여행도 다녀오시겠네요?”, 두 번째는 “쉬고 나서 이직 준비하시게요?”. 하도 대답들이 비슷하길래 나는 <퇴사하는 동료에게 건네는 첫마디> 같은 게 베스트셀러나 인기 강의라도 되어 있는 줄 알았다. 대충 하하 웃으며 네네그럼요네네 정도로 대답했지만, 사실 나는 둘 중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원래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그건 결코 아니다. 첫 번째 직장에서 장기근속 휴가가 나왔을 때에만 해도 한 달을 곧장 제주도 한 달 살이로 계획했었고, 실제로 그 시절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 할 만큼 하루하루가 값졌다. 남들에겐 평범할 만한 하루도 나에게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모든 게 영감이었다. 여행자, 이방인이라는 신분에서만 비로소 가슴 깊이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국내든, 해외든 쏘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여행을 가도 갔던 곳만 빙빙 돌게 되고, 내 마음의 고향 같던 마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가지 않기 시작했다. 언제 쉬어야 할지 모른 채 길어지기만 하는 근속 년수 탓이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야금야금 갉아 먹혔고,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누군가에게 여행은 놀고먹고 즐기는 것이라지만, 나에게 있어서 여행은 삶을 붙잡고 살 어떤 끄나풀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일련의 수행과도 같아서, 어떠한 밧줄도 가지고 돌아오지 못했다면 그 여행은 나에게 실패였다. 안 그래도 지친 몸에 실패하는 일까지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좋았던 기억마저 잊힐 것 같아서 나는 여행하는 일을 그만뒀었다.


그러던 중, 부산에 사는 유정과 대화하다가 내가 여행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이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마음이 기울 때마다 나는 어디 멀리 떠나고 싶지만 또 아주 멀리는 가지 못해서, 멀고도 가까운 유정의 집으로 도피하곤 했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다시 평평해졌다. 작년 여름 장마철에 부산에 갔었다. 비 내리는 차 안에서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기울어 있을 때는 꼭 유정도 기울어 있다고, 그런데 나를 만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진다고. 그러니 우리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보면 어떻겠냐고.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거야? 나는 물었고, 그런 거라도 있어야 살 것 같아서, 유정은 답했다.


그날부터 나는 비 오는 부산이 더 좋아졌다. 이번 주부터 부산에는 비가 내리는 듯했다. 재고 따질 게 없어졌다. 그때처럼 비 내리는 부산을 다시 보는 것, 서로의 구원을 약속하는 것. 그것 하나면 여행하기 충분한 듯했다. 나는 “이번 주에 부산 갈까?” 하고 물었고, 유정의 세찬 끄덕임에 오늘부터 나흘간 부산에 머무르기로 했다.


계획했던 첫날의 일정은 모두 어그러졌다. 비도 아직 오지 않았고, 잠도 설쳤지만 무엇이든 충동적으로 굴 수 있는 우리를 통해 숨통이 트인다. 일정이 다 어긋난 김에 내일 놀러 갈 곳은 랜덤으로 정하자며, 둥그런 원판에 부산의 구 16개를 적어 놓은 뒤 펜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그렇게 내일은 금정구에 간다. 어느 위치에 있는 곳인지도 모르고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함께 존재하는 것만으로 전부 괜찮아진다.


내일부터는 비가 온다 그랬다. 빗소리가 나를 깨워 줬으면 좋겠다. 유정이 잠버릇에 깨게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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