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28일차

by 채윤희

유정과 나는 주기적으로 수면 패턴이 뒤집어지곤 했다. 요즈음의 나는 자도 자도 잠이 와서 평소보다 두세 시간씩 더 늦잠을 잤는데, 유정은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 자던 중이었다. 오늘은 예약해 놓은 것들이 많아서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할 일정임에도 역시나 유정은 잠에 쉬이 들지 못했고, 나는 열두 시가 조금 넘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새벽 다섯 시, 유정은 자고 있는 내 곁에 다가와 치대기 시작했다.


나 목욕했다. 완전 좋은 냄새 나.

...... 히지 마....

맡아 봐아.

괴롭히지 마.......


유정은 내 몸에 고양이처럼 몸을 비비적대다가 “우웅, 마저 자” 하고는 스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거실에서 얼핏 들려오는 달그락 소리. 아홉 시가 넘었을 때쯤 나는 눈을 떴고, 유정은 혹시 차에서 배고프면 나눠 먹을 김밥을 싸 놨다고 자랑했다. 나는 하품을 하다가 픽 웃었다.


새벽에 김밥도 쌌어?

으응, 너 잘 때.

부지런해라.

너 중간에 손도 모으고 자더라. 손 모은 게 예쁘길래 사진 찍어 놨어. 몰래 찍은 거 불편해도 안 지울게.

지워 준다는 얘기가 아니구나.

응, 안 지울게. 내 마음이야.


유정은 이런 식으로 매사에 막무가내인 점이 있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유정이 좋아하는 예쁜 길로 가야겠다고 내비를 다시 찍는다든가, 좋아하는 길 위에서는 뒤에서 차가 빵빵거려도 느리게 차를 몬다든가, 갑자기 차 뚜껑을 포함한 모든 창문을 열고 비 맞은 풀내음을 느껴 보라 한다든가, 장어를 먹으러 기장에 가서 당연하게 전복죽을 주문해 버린다든가. 늘 내 의사는 딱히 묻지 않았고 모든 게 이미 실행되어 있었는데, 또 가만히 유정이 하자는 대로 따르다 보면 결과가 좋아서 평소에는 주관이 뚜렷한 나임에도 그녀 앞에선 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게 됐다. 유정이 고른 길은 볕뉘가 차랑차랑 들어 숲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장어집에서 먹은 전복죽은 내 인생에서 제일 맛있었던 전복죽이었고, 유정의 추천대로 기름장을 넣어 먹으니 더 맛있었다. 내가 조금 추워하면 “담요 있어” 한마디 후 차에서 담요를 가져다 던져 주는 카리스마까지. 과연 부산 상여자다웠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유일하게 하고 싶던 것은 부산의 방탈출이었는데, 그런 나를 위해 유정은 방탈출 네 개를 예약해 주었다. 사실 나는 방탈출에서 갇히고 다른 사람이 날 구해 주는 게 좋아, 같은 어이없는 발언에도 유정은 그게 뭐냐더니 네 번 다 책임지고 나를 구해 주었다. 집까지 돌아가는 길에는 스포츠 모드를 켜고 광안대교를 질주했다. 너 다음 차는 포르셰로 사야겠다, 엉, 그래야겠네. 시답잖은 말을 걸면 절대 지지 않고 쿨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또 집에만 들어가면 고양이처럼 내 다리를 베고 누웠지. 3박 4일은 너무 짧아. 3박은 너무 짧다고. 우리 다음 달에 또 보자. 그때 오로라 보러 가자.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다시 만날 미래를 약속했다. 그 당연한 막무가내의 약속 때문에, 나는 유정을 자꾸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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