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29일차

by 채윤희

서울로 돌아오는 길부터 편도가 따끔따끔하더니 집에 돌아와서는 대자로 뻗어 버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체력이 허약해졌는지 여행만 다녀오면 줄곧 열이 오르고 몸에 기운이 쪽 빠진다. 부산을 다녀오기 전부터 역류하고 있던 빨래바구니를 세탁기에 탈탈 털어 넣고, 수조에 넣어 두었던 분재를 빼 다시 창가에 올려 두었다. 며칠 사이 이끼 같은 잡초가 웃자라고 있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서울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첫 시작, 첫 울음소리, 첫 생각, 첫 고민. 모조리 서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서울을 떠났다 올 때마다 습관처럼 나의 몫을 찾았다. 펴야 할 다음 장,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몫, 내가 다해야 할 책임. 이 도시에 당도할 때면 가만히 있는 것이 용인되지 않는 것 같았고 형체도 없는 데드라인이 내 목을 죄어오는 듯했다. 이제 슬슬 다음 스텝을 위해 뭐라도 하고 있어야지, 생각은 해 봤니, 정체 모를 누군가가 규칙적으로 말을 건다. 마치 그렇게 묻는 것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사실 몇 가지 대안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첫째, 1년 정도만 IT 지원 업무 계약직을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고 업무 하중 없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둘째, 적당히 나를 지킬 수 있는 회사를 찾아 다시금 본래 직무로 돌아간다. 셋째, 벌써부터 고민하지 말고 세 달 정도는 마음 편히 쉰다.


나는 돈과 명예에 하등 욕심 없고 자아와 쉼이 제일 중요한 사람인 줄 알았건만,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그동안 받던 연봉과 쌓아온 길, 네임 밸류를 단숨에 포기할 만큼의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쉬고 싶다 목청껏 외쳤는데도 하루 쉬면 하루치 고민이 짙어졌고 아닌 척하려 애썼다. 회사라는 체계 자체가 맞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다른 회사는 혹시 다를지도 몰라, 아직 나 회사 두 곳밖에 안 다녔잖아, 같은 생각이 점점 뇌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회사원이라는 직업이 습관이 된 나는, 그동안 해 왔던 당연하고 편한 선택으로 회귀하려 했다.


그 와중에 첫 번째 대안이었던 회사의 채용 공고가 닫혔다. 퇴로가 막힌 셈이다. 어쩔 수 없이 기존 직무를 되살려야겠네, 채용 공고를 다시 뒤져 보는데 첫 번째 대안이 무너진 게 아쉽지도 않고 현실에 순순히 순응하는 것 같은 나 자신이 이중인격자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그동안 내가 바랐던 내 모습이 진짜 내가 바랐던 모습인지, 그저 멋있어서 동경하던 모습이었는지, 그러면 안 되는지 생각이 뒤엉키기 시작했고, 무엇이 됐든 자연스럽게만 살고 싶었는데, 지금은 나의 모든 선택 하나하나가 다 부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그때 나와 마찬가지로 진로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도 사실 매일 마음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데, 그 시점에 괜찮은 곳으로 결정하면 될 것 같아. 요즘은 점점 어디를 가도 정답이란 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제야 날뛰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러게. 그동안의 나의 모든 선택도 내가 조금 덜 다칠 선택들 뿐이었지. 어찌됐든 당장 내가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그 과정과 결과는 너무 거창할 필요가 없는 건데. 이상적인 자아와 당위적인 자아 둘 다 나의 자아인데, 그 둘을 왜 이리 싸움을 붙이는지.


친구와의 대화 후, 씻고 공부를 좀 해야겠다 다짐했지만 내 몸은 나도 모르게 침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무언가를 시작할 때 준비 과정이 많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뀐 것 같다. '그냥', '일단'이라는 게 왜 이렇게 어려워졌는지. 오래된 메신저 대화 창을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질 않는 사람들과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자랑스러웠던 때가 언제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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