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을 같이 시작해 보자던 우리는 시청을 시작하자마자 까무룩 잠들었고, 새벽 내내 뒤척였다. 다섯 시쯤 유정은 잠이 완전히 깼다며 잠들어 있던 내게 이것저것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잠에 든 듯, 아닌 듯한 상태로 웅얼거리다 깨어 버렸고, 비척비척 거실로 걸어 나가 보니 고양이도 아직 잠투정 중이었다.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렸다. 금정구에 가서 점심으로 오리고기를 먹자 약속했는데 도저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리는 저녁으로 미루자며, 일단 피자를 시켜 먹고 난 뒤 우리는 혈당 스파이크에 완전히 굴복했다. 내가 소파에 앉자 유정은 내 다리를 베고 누웠고, 그대로 일 초 만에 잠들었다.
유정의 집에는 고양이 네 마리가 산다. 두 마리가 차례로 잠든 유정의 발 밑, 머리맡에 몸을 웅크렸다. 귀여운 광경에 사진을 한 장 찍은 뒤 스르르 벤 다리를 빼고 빠져나와 유정의 방으로 들어갔다. 빗소리가 자장가 같았다. 그제야 나도 편한 잠에 들었다. 간만의 낮잠이었지만, 어제 약속한 일정 탓에 오래 자진 못했다. 중간에 깨어 거실에 나와 보니 이제는 고양이 네 마리가 모두 소파에 유정과 끼여 색색 자고 있었다. 두 마리는 일렬로 허벅지 옆에, 한 마리는 배 위에, 한 마리는 머리 위에. 유정이 졸린 눈을 비비며 얼른 나가야 되는데, 하자 나는 그냥 집에 있어도 된다 그랬다. 평화로운 일상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일정을 뒤로하고 졸리면 잤다가, 깨어지면 빗소리를 듣는 하루를 보냈다. 주인처럼 애교가 많은 고양이들은 내 다리에 머리를 연신 비비고 놀아 달라는 듯 냐– 냐– 울었다. 엉덩이를 톡톡 쳐 주자 발라당 누워 배를 보여 줬다.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눈까지 감고 고롱고롱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잠깐 손을 멈추면 눈을 번쩍 뜨곤 “이 인간이 왜 쓰다듬는 걸 멈추지?”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네네주인님쓰다듬을게요, 하고 나는 몇 분을 그렇게 고양이에게 묶여 있었다. 이런 포박이라면 나 언제라도. 몇 시간이 되더라도.
다른 일정은 전부 캔슬되었지만, 올해의 사소한 목표를 적어 보자던 것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즈음에도 유정과 함께 뒤늦은 목표를 작성해 본 적이 있었다. 그날 우리가 갔던 카페의 벽면에는 포스트잇이 가득했는데, 특히 신년 목표를 적어 놓은 사람들이 많았고 그걸 본 유정은 우리도 적어 보자 그랬다. 나는 좋다고, 하지만 거창한 것 말고 ‘사소한’ 것만 적자 당부했다. 그렇게 나는 아래와 같은 목표를 적었었다.
1. 감성힙합 좋아하는 사람 경멸하지 않기
2. 마라탕후루 챌린지 하는 사람 헐뜯지 않기
3. 맛춤뻡 틇리늖 사람 저주하지 않기
분명히 꼭 사소하자 말했는데 유정은 아래와 같은 목표를 내걸며 내 목표를 조악하게 만들어 버렸다.
1. 4개월치 일기 8월 안에 쓰기
2. 책 안 읽었다고 독서 모임 빠지지 않기
3. 채윤이랑 3번 이상 만나기
올해도 또 나만 사소하면 안 된다며 거듭 당부한 뒤 같이 침대에 엎드려 목표를 적기 시작했다. 커닝하지 않았는데 같은 목표가 있었다.
채윤이의 2025 목표!!
1. 김밥 풀리지 않게 싸는 거 성공하기!!
2. 에반게리온 안 자고 보기!! 그리고 정신 꼭 멀쩡하기!!
3. MBTI _S__인 사람이랑 말 안 통할 거라 예단하지 말기!!
유정이의 2025 간단 목표!!
1. 에반게리온 정주행 (오타쿠 새싹이 되기 ㅎㅎ) 애니 하나 이상 끝내기
2. 외박 횟수 5번 이하 (고양이가 싫어함)
3. 일기 늦어도 꼭 쓰기. 글 쓰는 감각 잃어버리지 않기.
4. 작사 학원 귀찮다고 빠지지 말기
어쩐지 이번에도 내가 훨씬 사소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여름 다 되어서 웬 신년 목표냐고 핀잔 줄 사람이 없어서, 다시 같이 에바에 타 보자며 깔깔거릴 사람이 있어서. 나의 지난했던 25년 상반기가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긴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