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은에게
이다지도 아름다운 삶이라더니 곧잘 싫증 나서는. 요즈음의 삶은 느껴지는 게 없는 삶이고 육신은 괴로움 티 내는 양 픽픽 쓰러져 잠들기 일쑤다. 살아가고 있지만 죽어 있는 것 같을 때, 그럴 때는 꼭 공기를 축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나는 어떤 끄트머리를 잡고 살고 싶어서 버둥대는 걸까. 세상에는 사람도 많고 사랑도 많고 문학도 많고 예술도 많은데 왜 내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지. 책을 봐도 내가 글을 읽는 건지, 글자가 읽히는 건지, 영화는 왜 이십 분을 넘기기가 힘든지, 왜 꼭 패스 페일로 점수 내는 것처럼 본 것만으로 끝내게 되는 건지. 누굴 봐도 궁금하지 않고 누구든 나를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냥저냥 이어지는 것들의 연속. 면이 될 수 없이 죽죽 그어져 있는 선들. 궁금한 사람에 대한 집착은 종종 나를 집어삼킨다. 왜 나는 누가 나를 자꾸 궁금해해 줬으면 하는 건지. 뭐 그렇게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런 것들을 바랐나 보다. 대단할 것 없이도 대단해지는 사랑. 습작일 뿐이면서 마스터 피스 같지 않냐고 떵떵거리는 사랑. 우리가 만든 세계를 보라고, 우리가 이렇게 멋진 세상을 만들었다고, 우리는 이만큼 멋진 사람들이라고 서로를 기특해하는 사랑. 서로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랑. 세상을 만든 것도 그곳에 사는 것도 둘 뿐이라서 완벽하게만 느껴지는 사랑. 뭐 그렇게 흥미로운 사랑.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랑.
앓는 소리 지겨울 만도 한데 그럼에도 죽어 가지 말라고 사랑받곤 한다. 반년 만에 만난 예은은 꽃다발과 편지 한 통을 안겨 주었고 꽃을 가져오는 순간이 근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예쁜 마음도 함께 안겨 주었다. 칵테일 두 잔을 비우고 예은이 별소리를 다 한다고 말할 때 나는 오늘만큼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예은 앞에서 나는 금방 특별해졌다. 만날 때마다 고맙게도 받는 꽃들은 시들어도 버리기가 아까워서 오늘도 나는 버리기 싫다는 소리를 했는데 얘는 또 독심술이라도 쓴 건지. 이번에는 꽃 시들면 버려야 해. 그래야 또 사 주지. 계속 계속. 예은의 편지 속에서 발견했다. 대단한 사랑. 언니 덕분에 나는 정말 많은 게 좋아진 것 같아.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는 그렇게 대단할 것 없이도 대단해지고. 가끔은 선과 선이 닿는 것 같은 날도 있었다. 이 사랑으로 하루 또 먹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