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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색달 Mar 29. 2024

단돈 8만원에 얻은 교훈

턱시도와의 만남과 이별.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테니스 레슨비를 세 번째 입금한 날. 레슨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 내게 코치님이 말씀하셨다.

‘이제 슬슬 라켓 한 번 알아봐요.’

레슨을 받자마자 라켓부터 산 뒤에 생각보다 힘들어서, 어려워서, 부상을 당해서, 재미가 없어서 등의 이유로 금방 그만두는 사람들을 많이 목격했다면서 내가 라켓을 사도 될 듯하면 언질을 주겠다고 하셨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났고 드디어 내게 라켓 구매에 대한 허락이 떨어졌다. 그동안 출근하면 가장 먼저 테니스 용품 사이트에 들어가 라켓을 보고 장바구니에 담은 뒤 구매 버튼을 누르고 주소를 입력하다가 임금의 명을 따르는 충신의 기개로 끓어오르는 구매욕을 억눌러 구매 취소 버튼을 눌러온 지난 육십여 일이었다. 이제는 임금의 명이 바뀌었다. 견마지로의 자세로 명을 받을 준비가 이미 돼있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샤워를 하고 맥주 한잔을 따라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수십 번 들어갔다 나왔던 ‘윌슨’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내가 사고 싶은 라켓은 ‘블레이드’라는 라켓이었다. 레슨 때 쓰는 라켓이기도 하고 코치님의 말처럼 대중적이고 누구나 쓰기 편한 라켓이란 후기가 많았다. 바로 구매 버튼을 누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구매 버튼이 있어야 할 위치엔  ‘Sold out’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블레이드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라켓들이 재고 부족이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다른 테니스 용품 홈페이지도 여러 군데 들어가 봤지만 상황은 똑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중고 사이트에서 ‘테니스’를 검색해 봤다. 검색결과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근데 딱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혼자 필터 효과라도 받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내 마음을 뒤흔드는 마법 세 글자. ‘페더러’였다.


‘페더러 라켓. 프로스태프 턱시도. 340g 2 그립. 페더러 사인 있습니다.’

제목을 보자마자 내용을 확인했다. 라켓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인데 라켓 헤드의 좌, 우만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Pro Staff’라는 단어가 좌측 라켓 넥 부분에 적혀 있었고 그 안쪽에 정말 로저 페더러의 사인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의 조화가 마치 결혼식날 신랑이 입는 턱시도 같아서 그런 이름이 붙은 듯 했다. 나는 사진을 보고 턱시도보다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이 먼저 떠올랐다. 라켓 헤드의 둥글둥글한 이미지와 블랙, 화이트 조합이 황제펭귄의 몸매, 색상과 닮아 보였다. ‘테니스의 황제! 로저 페더러의 라켓. 황제펭귄!’ 라임도 딱 맞는다. 꽤 괜찮은 이름 아닌가?

라켓에 대한 설명을 읽어봤다. 판매자는 여성분이었는데 라켓이 이뻐서 샀다가 자신이 쓰기에 너무 무겁고 힘든 라켓이라 판매한다고 쓰여있었다. 자신도 중고로 산 제품이지만 워낙 깨끗해서 새것 같은 컨디션이며 자신도 한 번 시타한 게 전부라고 했다. 가격은 8만 원. 8만 원? 너무 저렴했다. 윌슨에서 본 라켓은 30만 원 전 후의 가격이었는데 중고라고 해도 가격이 너무 쌌다. 예전에 친구가 ‘구름과 지표면 사이에서 공중 전기의 방전이 일어나 만들어지는 불꽃’ 장터에서 저렴하게 명품 가방을 구매했다가 사기를 당해 울분을 토하는걸 옆에서 지켜본 적 있다. ‘저렴하면 의심해야 돼.’ 친구가 부두술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그 말을 떠올렸다. 바로 포털사이트에서 라켓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라켓이 저렴한 이유를 알았다. 프로스태프 턱시도는 출시일이 2018년이었다. 무려 4년 전 라켓. 작년 사진만 봐도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데 4년 전 라켓이면 사람들의 관심 밖인게 당연했다. 또한, 라켓도 스마트폰처럼 새로운 버전이 나올 때마다 기능적으로 업그레이드가 된다고 하니 대부분 최신 라켓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 라켓의 가장 큰 문제는 무게였다. 340그램. 라켓 줄을 묶지 않았을 때의 무게. 순수 라켓 무게가 340그램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280에서 320 정도, 여성은 240에서 290 정도의 무게를 많이 사용한다. 자신의 신체나 근력에 비해 무거운 라켓을 사용하면 부상의 우려가 있다고 했다. 340은 판매되는 라켓 중에 가장 무거운 라켓에 속하며 인터넷을 다 뒤져봤지만 그 누구도 추천하지 않는 무게였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나의 첫 라켓을 황제펭… 아니 턱시도로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까? 340그램을 내가 쓸 수 있을까? 4년 전 라켓을 쓰는 게 맞을까? 나는 다시 중고사이트로 이동해 판매자의 글을 천천히 다시 읽었다. 그러다 잊고 있던 사실을 발견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페더러의 사인이었다. 페더러가 직접 한 싸인은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어디서 페더러 사인을 구경이라도 하겠나? 아무 의미도 없는 사인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이 라켓 최고의 디자인 요소였다. 

340그램도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근력이 좋은 편이었고 농구 드리블 연습을 많이 하다 보니 오른손은 더욱 힘이 좋았다. 340그램이면 일반적인 농구화 보다 조금 가벼운 무게였다. 그 정도 무게가 내게 무리일 거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300그램 라켓과 겨우 40그램 차이였다. 40그램이면 드립커피 한 잔 내릴 때 커피 원두 무게다. 그정도 무게가 더나간다고 테니스를 못친다? 컵라면에 물 40ml 덜 넣었다고 너무 짜서 못먹겠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생각을 정리해 봤다. 이쁜 디자인, 좋은 컨디션, 도전할만한 무게, 페더러의 사인. 그리고 8만 원.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테니스 라켓 구매 가능할까요?’

답장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못 치겠으면 벽에다 걸어두지 뭐.’

라켓을 받고 바로 찍은 사진. 황제펭.. 아니 프로스태프 턱시도.


며칠이 지나 커다란 택배 상자에 실려온 라켓은 실제로 보니 훨씬 더 고급스럽고 멋졌고 생각만큼 무겁지 않았다. 물론 코치님은 라켓을 확인하시고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셨다. 프로스태프라는 라켓 특성상 쓰기 어려운 라켓이며 코치들도 꺼려하는 라켓 중 하나라고 하셨다. 무게 얘기도 빼지 않았다. 340이면 많이 무거운 라켓이니. 혹시 쓰다가 팔꿈치가 아프거나 근력이 부족한 느낌이 들면 바로 다른 라켓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손에 있던 턱시도를 가져가시더니 이리저리 살피고 허공에 스윙을 하면서 내게 말하셨다.

“아… 이거 쓰기 쉽지 않을 텐데? 다른 것도 좀 알아보시지.’

“8만 원이라서요.”

“그럼 사야죠.”

이 대화를 끝으로 레슨이 시작됐다. 들뜬 마음으로 코트를 달리고 라켓을 휘둘렀다. 이전과 별 차이 없을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턱시도는 이전에 쓰던 라켓과 느낌이 너무 달랐고, 그냥 들었을 땐 그다지 무겁지 않았던 라켓도 스윙을 이어가다 보니 그 무게감이 확실히 느껴졌다. 이상 징후나 통증은 없었지만 어딘가 힘들고 불편한 기분이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지 몰랐다. 첫 개인 라켓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적응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그 기간이 2년을 넘길 줄은.

턱시도에 적응하기 윈한 노력. 결국 실패했다.

턱시도는 결국 벽에 걸렸다. 턱시도에 적응하고자 많은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테니스를 열심히 할수록 턱시도는 나를 힘들게 했다. 라켓이 무겁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립을 꽉 쥐게 되고, 당연히 스윙에 힘이 들어갔다. 단순히 공을 잘 못 치는데서 그치지 않고 끝내 부상도 발생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오른 속 약지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손가락을 피거나 구부리면 어딘가 걸렸다 튕기는 듯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곧장 정형외과로 가서 진료를 받았더니 ‘방아쇠 수지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손가락에 너무 힘을 줘서 힘줄을 감싼 막이 붓거나 결절을 형성해 생기는 질환이라고 했다. 테니스 초보인 내가 라켓이 무거워 나도 모르게 힘 껏 움켜잡고 스윙을 했기 때문이다. 약지 부위에 엄청 아픈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았고 이 주가 넘게 테니스를 치지 못했다. 손가락이 나은 후, 나는 코치님과 상의해 290그램짜리 프로스태프를 새로 구매했고 현재는 315그램짜리 프로스태프를 사용한다. 턱시도 포기했어도 페더러는 포기하지 않았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유명하지만 실제론 그리스 델포이 신전 기둥에 적혀있었다고 한다. 누가 말했든 간에 3000여 년이 흘러도 저 말이 가진 힘은 조금도 힘을 잃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저 역사적 명언을 ‘자기 객관화’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인식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각자가 주관적인 경험, 그리고 선입견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자기 객관화는 개인의 발전과 성취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가 되었다. 

프로스태프 턱시도가 나에게 자기 객관화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줬다. 나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지 못했고 타인의 정확한 평가를 명확한 이유나 근거 없이 무시했다. 적응의 실패를 직감했으면서도 이를 거부했고 그 결과는 부상으로 나타났다. 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했던 도전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할 때 자기 객관화를 위해 노력한다. 빠른 결심보다 느린 성찰이 목표에 더 빨리 도착하게 해 준다는 걸 알았다. 중요한 건 언제나 나 자신이다. 성공도, 실패도, 도전도, 포기도, 성장도, 퇴보도, 결국 내 안에서 결정된다. 단돈 8만 원에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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