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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색달 Apr 01. 2024

루피의 모험이 길어도 지루하지 않듯이.

너. 내 동료가 돼라!

테니스 레슨은 이십 분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운동량은 매우 많다. 테니스 코트의 가로길이는 약 11미터인데 이 거리를 쉬지 않고 계속 왕복하며 포핸드 스트로크와 백핸드 스트로크를 치다 보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폐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느껴진다. 하지만 운동량이 곧 테니스 레벨 업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계속해서 흐트러지는 스윙을 바로 잡고, 꼬이는 스텝을 개선하고, 공과 나의 거리를 정확히 조절하기 위해서는 코칭을 받으며 동작을 점검 해야 한다. 개선할 점을 확인하고 다시 코트를 내달리다 보면 어느새 레슨 시간은 거의 끝나가고 다음 타임 레슨생이 코트 밖에서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레슨이 끝나고 공 정리를 하면서 오늘 배운 걸 곱씹어본다. 이것저것 배운 거 같긴 한데 딱히 뭐가 바뀌고 있는 건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이십 분. 분명 운동량은 많지만 너무 짧은 시간이다. 수업이 끝나고 복습을 위해 독서실로 향하는 학생처럼, 나에게도 레슨이 끝나면 복습할 ‘독서실’이 필요했다.  


포털 사이트에서 테니스 연습장을 찾았다.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24시간 무인 테니스 연습장이 있었다. 마침 연차를 쓴 평일 낮이어서 라켓과 테니스화를 주워 담아 바로 연습장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번화가 근처의 높은 건물이었다. 주차를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가 테니스 연습장 문을 열었다. 반으로 잘린 테니스 코트가 두 개 있었고 튼튼해 보이는 그물이 코트를 감싸고 있었다. 입구 근처에 이용 방법이 적힌 배너가 서있었고 거기 적힌 대로 충전카드를 만들었다. 연습 코트를 사용하고, 자판기도 이용할 수 있는 카드였다. 이 만원을 결제하니 이만 오천 원이 충전되었다. 결제 금액의 25퍼센트가 보너스라니. 인심이 좋은 사장님에게 감사를 보냈다. 신고 온 운동화를 벗고 테니스화로 갈아 신으며 코트 밖에 붙어있던 사용방법을 빠르게 읽었다. 한 타임에 이천 원이 감액되고 공은 오십 개가 나온다고 쓰여있었다. 코트 구석에 있는 콘솔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공의 구질과 방향, 그리고 난이도를 정한 뒤 카드를 결제하는 곳에 터치하면 공이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조그만 문을 열고 코트 안으로 들어가 간단히 몸을 풀었다. 콘솔로 이동해 버튼들을 꾹꾹 누른 뒤 카드를 접촉하자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첫 번째 공이 튀어나왔다.

50개의 공이 다 나오는데 약 삼 분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 공이 빠르게 나와서 쉬지 않고 스윙을 해야 했다. 얼굴엔 송골송골 땀이 맺혔고 나는 그대로 다시 한번 카드를 찍었다. 공을 치기 바빴던 처음과 달리 이번엔 레슨 시간에 배운 걸 제대로 복습해 보자는 마음가짐이었다. 팔로우 스윙과 정확한 면 만들기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삼 분이 흘렀다. 코트 밖으로 나와 비치된 벤치에 앉아서 차오른 숨을 고르고 있었다. 공 오십 개에 이천 원이면 괜찮은 가격이라 생각했는데 계산해 보니 삼십 분에 이만 원이었다. 

‘와. 삼십 분에 치킨 한 마리라니…’

카드에 충전된 금액을 아껴 써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출입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20대로 보이는 여자는 검은색 정장바지에 긴 코트를 입고 굽이 낮은 검정 구두를 신고 있었다. 사장님이나 매장 매니저인 줄 알았던 그녀는 옆 코트 벤치에 앉더니 코트와 구두를 벗었다. 그리곤 들고온 가방에서 운동화를 꺼내 갈아 신은 뒤 매장 구석에 있는 대여용 라켓 중 하나를 뽑아 들고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콘솔로 이동해 능숙하게 버튼을 조작하더니 코트 중앙으로 가 힘차게 공을 때리기 시작했다. 정장 차림에 테니스를 치는 모습이 신기해서 한 동안 그 모습을 쳐다봤다. 테니스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듯한 스윙이었지만 구슬땀을 흘리며 연신 스윙을 하는 모습이 왠지 멋있어 보였다. 머릿속에 있던 치킨 생각이 사라지고 다시 테니스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나는 다시 빈 코트 안으로 들어가 카드를 찍고 스윙을 시작했다.

오십 개의 공을 서 너번 정도 쉬지 않고 친 뒤 밖으로 나오면서 보니 옆 코트의 그녀가 벤치에 앉아있었다.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상태라 최대한 그 여성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 땀냄새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아무리 땀이 나도 냄새가 난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고부터 내 땀 냄새에 내가 놀라는 일이 잦아졌다. 언젠가부터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면 대부분 안 좋은 모습이다. 그 순간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저… 혹시 테니스 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다행히 땀냄새 때문은 아니었다.

“저. 이제 세 달 정도 됐어요.”

“와. 진짜요? 저도 그 정도 됐는데… 엄청 잘 치시네요.”

“아… 그건 아닌데…  뭐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하하하.”

부장님의 농담에 대처하는 신입 사원의 웃음소리만큼 영혼 없는 웃음소리가 끝나자 그녀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이제 30대 초반인 그녀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현재는 개인 레슨을 하고 있었다. 평소 운동 부족이라 꾸준히 알 운동을 찾다가 테니스를 알게 됐고, 현재 집 근처에서 레슨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안돼 동네에 친구가 없다며 같이 테니스 칠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내게 이 연습장에 자주 오냐고 물었다. 나는 오늘이 처음이고 앞으로 꾸준히 올 생각이라고 답했고 그녀는 잘 됐다는 듯 다음에 시간 맞으면 같이 와서 연습하자고 했고 결국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오 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어진 짧은 대화를 통해 나는 극 E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살짝 살펴볼 수 있었다. 들어올 때의 모습으로 다시 출입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나는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겹쳐 보였다. 결국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은 이거였다.

‘너. 내 동료가 돼라!.’


며칠 뒤, 피아노 치는 루피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일 연습장에 가려는데 같이 갈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별일 없었던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다음날 약속시간에 맞춰 연습장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그녀는 먼저 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이번엔 트레이닝 복을 위아래 세트로 입고 있었다. 원래 테니스 칠 때 정장을 입는 특별한 취향의 소유자이길 조금은 바랐지만 그렇게 특이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 말고도 다른 손님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인사를 했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녀는 벤치에 앉아있던 다른 여성을 부르더니 나에게 소개를 해줬다. 알고 보니 그 며칠 동안 다른 동료를 만든 것이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새로운 동료와 인사를 나눴다. 딱 봐도 체육인의 포스가 물씬 품기는 여성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어깨와 팔은 근육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하체는 스치듯 봐도 딴딴해 보였다. 새로 만난 그녀는 헬스트레이너였다. 운동을 알려주고 있는 헬스클럽 회원이 자신에게 테니스를 추천해서 테니스에 뛰어든 그녀는 이미 라켓을 포함한 모든 물품을 다 구매한 상태라고 했다. 거기에 일주일에 세 번씩 레슨을 받고 있을 정도로 테니스에 푹 빠져 있었다. 서로 소개를 마치고 곧장 테니스 연습에 돌입했다. 먼저 온 트레이너 여성에게 코트를 양보하고 밖에 앉아 그녀가 공치는 걸 지켜봤다. 헬스 트레이너는 역시 달랐다. 라켓을 휘두를 때마다 삼두와 이두가 춤을 췄다. 나도 모르게 내 팔을 바라봤다. 앞으로 긴팔 티셔츠를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연습을 마치고 나오며 우리는 단체 톡방을 만들었다. 태린이에서 벗어나 테른이 가 될 때까지 함께 정보도 공유하고, 연습도 함께 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렇게 이어진 톡은 집에서 까지 이어졌다. 다들 집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테니스 연습장이 딱 중앙 지점이라 그 연습장을 우리의 아지트로 정했다. 톡은 끊이지 않았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대화를 하고 농담을 했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단톡방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가 만났을 때,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궁금해하는 그녀들에게 네 글자를 타이핑해 보냈다. 그리고 곧 단톡방 이름은 그 네 글자로 결정됐다. 바로 ’우당탕탕’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같이 테니스를 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하며 테니스 라이프를 함께 했다. 하루는 카카오톡에 피아노 선생님의 생일이라는 알림이 떠있었다. 마침 그날이 함께 연습하기로 한 날이어서 나와 헬스 트레이너 친구는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한 시간 남짓 연습을 마치고 나올 때 우리는 그녀에게 준비한 선물을 전달했다. 그러자 그녀는 정말 깜짝 놀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사 와서 동네에 친구가 없었던 터라 올 해는 제대로 된 생일 축하를 받지 못할 줄 알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녀는 너무나 고맙다면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고 우리는 근처 치킨집으로 이동해 간단히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집에 가는 길에 그녀는 장문의 카톡으로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아주 좋은 친구가 생긴 거 같아 행복하다는 말도 덧 붙였다.


나는 친구들을 아주 좋아했다. 바쁜 부모님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들 덕분에 나는 혼자일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친구들을 만나 의지했다.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에서 진학애 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아무리 어린 후배도 나와 친하면 친구가 됐고,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서로가 웃고 장난을 칠 수 있으면 나의 친구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친구를 사귄 건 아주 오래전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직함이 이름처럼 불리는 회사 생활에선 친구를 만들기 어려웠고, 사회에서는 오래 보고, 자주 만나도 결국은 아는 사이, 지인들이 됐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핸드폰 연락처를 다 뒤져 봐도 한 손에 꼽힌다. 그들과의 우정도 빈지노의 말처럼 ‘짤막한 문자가 다인 현대식 우정’이다.

그런 나에게 친구가 생겼다. 단순히 안부를 묻거나, sns에서 좋아요를 눌러주는 친구가 아니라 자주 만나 시간을 보내고 같은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친구가 생긴 것이다.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태어난 곳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살아온 모습도 달라 살면서 쉽게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 테니스’란 스포츠로 인해 우정을 쌓게 됐다. 물론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은 아니지만 서로를 ‘친구’라 칭할 때의 포근함과 따뜻함은 만난 기간이 짧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친구를 만들려면 찾지 말고 되어줘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테니스에 가진 열정, 그리고 테니스를 대하는 태도가 나를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줬다. 다행히 그들도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려 했고, 덕분에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됐다. 학창 시절에는 대학을 보며 걸었고, 대학 시절에는 사회를 바라보며 걸었던 것처럼. 이제 나는 그들과 더 나은 테니스를 향해 걷는다. 그 걸음이 조금 느리더라도 괜찮다. 루피의 모험이 길어도 지루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걷는 시간이 길어져도 지루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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