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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색달 Apr 15. 2024

최악의 최악은 의외로 별거 아니다.

처음 코트로 나설 때 드는 걱정을 이겨내는 방법

새로운 테니스 코트를 찾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당탕탕 클럽’의 멤버 중, 헬스 트레이너 일을 하고 있는 J의 강력 추천을 믿고 J가 레슨을 받고 있는 곳에서 다시 레슨을 받기로 했다. 전에 레슨을 받던 곳과 달리 이곳은 5층짜리 건물의 5층과 옥상에서 레슨을 하고 있었다. 5층에는 정규 코트를 케이크 자르듯 반으로 싹둑 잘라 놓은 듯한 반 코트 두 개가 나란히 있었고, 그 사이에는 그물이 쳐져 있었다. 주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분들이나 어린이들이 그 곳에서 레슨을 받았다. 나도 첫 레슨과 두 번째 레슨까지는 실내에서 받았는데 반코트는 장단점이 매우 뚜렷했다. 

좁고, 답답한 점이 가장 큰 단점이었다. 어린이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두 발로 서있는 흑곰 같다는 첫인상 평가를 심심치 않게 받는 나에겐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코트가 너무 좁았다. 가끔 스윙을 하려다가 그물에 라켓이 걸릴 것 같아 라켓을 멈춰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단점은 내가 친 공의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내가 공을 치면 네트를 넘어가자마자 반대편 그물에 걸리기 때문에 인, 아웃을 확인할 수 없었다. 공을 타격하는 순간 ‘됐다!’ 싶은 느낌이 왔는데 공이 얼마 못 가 그물에 퍽 하고 걸려버리면 그만큼 아쉽고 허무한 게 없다. 

하지만 장점도 분명했다. 공을 주는 코치님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잘못된 점이나 부족한 점을 더 쉽고 빠르게 교정할 수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지만, 눈에서 가까워지면 디테일은 더 가까워진다. 코치님은 내 스윙과 스텝을 교정해 주셨고 불필요한 동작을 찾아내 주셨다. 내게 멀지 감치 떨어져 공을 주시던 이전 코치님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것들이 많았다.

또 하나의 장점은 내가 친 공의 결과에 신경을 안 쓰게 되면서 스윙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 농구를 시작할 때, 슛 동작을 익숙하게 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 하늘로 슛을 던 지 듯 공을 계속해서 던졌다. 골대도 없는 맨 하늘에 공을 던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골대에 공을 넣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다. 코트에서 슛 연습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슛을 성공시키기 위해 정상적인 폼에서 벗어나거나 과하게 힘을 줄 때가 있다. 이는 올바른 슈팅 메커니즘의 정착을 방해하기에 차라리 침대에 누워 허공에 공을 던지는 게 올바른 슛폼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반코트에서의 테니스도 이와 유사한 결과를 가져왔다. 공이 어디에 떨어질지 중요하지 않으니 공을 치고 나서 반대편 코트를 볼 필요 없이 라켓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덕분에 공을 더욱더 오래 볼 수 있게 됐다. 골프도, 선거도, 테니스도 고개 쳐들면 끝나는 거다.

하지만 나는 곧 반코트를 벗어났다. 세 번째 수업부터는 옥상에 있는 풀사이즈 코트에서 레슨을 받았다. 카펫 같은 파란 잔디로 된 코트였는데 모래가 잔뜩 뿌려져 있어서 꽤 미끄러웠다. 사방을 두터운 검정 그물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하늘과 산, 건물과 도로가 그대로 보여서 꽤나 멋진 배경을 만들어줬다. 레슨 중간에 주황색과 빨간색, 그리고 보라색이 살짝 섞인 노을이 하늘을 조금씩 물들여 갈 때는 라켓을 잠시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 하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새파란 코트와 이를 감싼 녹색 잔디. 그리고 뜨거운 노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코트는 ‘테니스 치길 잘했다.’ 란 생각을 다시 한 번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사진으로 보기완 다르게 낭만적이고 예뻤던 옥상 코트

새로 만난 코치님은 중년의 여성분이셨다. 말투는 조곤조곤하셨고, 행동은 나긋하셨다. 하지만 잘못된 점을 찾아내면 제대로 알 때까지 설명을 하셨고 몸에 익을 수 있게 계속해서 반복시키셨다. 이는 내게 매우 잘 맞는 코칭법이었다. 이 전에는 공을 많이 쳤다면 이번 코치님은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 주고 잘못된 점을 교정하는데 중점을 두셨다. 가끔 설명이 길어지거나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시키실 때면 이렇게 말하셨다.

‘레슨시간은 배우는 시간이다. 연습은 따로 코트에서 해야 한다.’

나도 연습을 위해 테니스 연습장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기계가 보내주는 정직하고 약한 공을 치는 것과 코치님이 구석구석으로 강하게 찔러주는 공을 치는 건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만큼이나 달랐다. 코치님께 연습을 해도 늘지 않는다는 푸념을 털어놓자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하셨다.

‘테니스가 사람이랑 하는 건데 왜 기계랑 연습을 해 해요? 연습도 사람이랑 해야지.’

그러면서 내게 카카오톡 단톡방 하나를 알려주셨다. 테니스를 배운 지 얼마 안 된 이 지역 사람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이라고 하셨다. 확인해 보니 회원수는 약 200여 명이었고 주로 시민체육관 야외 테니스 코트에서 시간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은 했지만 마음속으론 걱정이 앞섰다. 테니스를 배우면서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소위 ‘텃세’에 관한 이야기였다. 코트에 나갔다가 상처를 받고 돌아온 사람들의 경험담을 접하는 건 부엌에서 숟가락을 찾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냥 좀 더 실력이 늘었을 때 나가봐야겠단 생각을 하며 짐 정리를 하고 있던 내게 코치님이 말했다.

‘꼭 한번 나가 봐요. 세상에 ‘처음’ 없는 사람 없어요.’


집에 돌아와서 테니스 관련 커뮤니티, 테니스 매칭 어플 게시판을 검색했다. 그곳에서 내 눈에 확 띈 제목 몇 개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적어도 3년은 치고 나오세요. 제발. 짜증 나니까.’’

‘일 년 차 테린인데 오늘 코트에서 욕먹고 왔습니다.’

‘원백치는 허세충 새끼들 짜증 나 뒤지겠네.’

‘젊은 여자들은 구력 상관없이 받아주면서 남자는 입상자만 가입 가능하다는 개 같은 클럽’

‘오늘 처음 코트 나갔다 기분 더러워서 테니스 때려치웁니다.’


핸드폰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내가 코치님께 뭘 잘못했길래 나를 저런 지옥 같은 곳으로 인도하는 걸까?’

나는 일 년은커녕 아직 반년도 안 됐고, 원핸드 백핸드를 치는 ‘허세충’(?)이었고, 대회 입상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코트에 나갔다가 기분이 더러워서 테니스를 때려치운다는 사람의 글을 읽어보니 나와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배운 지 얼마 안 됐고 연습만 받다가 어플을 통해 코트를 나간 사람이었다. 6개월 미만의 태린이를 구한다고 해서 갔는데 테니스 치는 내내 한숨을 쉬고, 실수할 때마다 짜증 섞인 탄식을 내뱉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스윙하는 법을 가르치려 들었다고 했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한 건 알았지만 그 사람들의 태도에서 모멸감을 느꼈고 이런 게 테니스라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는 글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괜히 조바심에 휩쓸려 코트에 나갔다가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테니스와 멀어질까 걱정이 됐다. 걱정은 아웃사이더의 랩 만큼 빠르고 강력해서 한 번 머릿속에 자리를 잡으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대충 치워버려선 안된다. 확실히 없애지 않으면 내면의 지독한 어둠을 양분 삼아 조금씩 몸집을 키워 다시 정신을 지배하기 십상이다. 그렇게 몸집을 불린 걱정은 결국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데 까지 이른다.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탁해지고 지저분해졌다. 욕을 먹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분노를 느끼다 테니스에 대한 악감정에 라켓을 집어던지고 다시는 테니스코트에 발을 딛지 않기로 다짐하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지금까지 테니스에 투자한 시간과 돈이 아무 의미 없는 소비가 되었다는데 좌절하는 나를 상상했다. 지끈지끈 두통이 오는 듯해서 나는 백기를 들었다. 계속해서 커져가는 걱정과 불안을 방치하기로 했다. 동시에 그 최악의 끝이 어딘지 궁금했다. 그 모든 최악이 내일 코트에 나가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일이었다. 난 최악의 최악을 계속해서 떠올려보려고 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생겼다. 갑자기 걱정이 사라진건 아니다. 단지 최악의 상황이 매우 하찮아 보였다.

나는 비행기 공포증이 있다. 주로 이륙과 착륙 시에 극심해지는데 아무리 비행기를 자주 타도 사라지지 않는다. 비행기가 폭발하거나 추락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단순히 상상하는 걸 넘어 곧 그런 일이 생길 거란 이상한 확신이 든다. 물론 비행기가 적정고도에 다다르고 좌석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방송이 나오면 내 확신이 틀렸다는 걸 깨닫고 안도한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두 번씩 죽음의 공포감에 식은땀을 흘리고 손을 벌벌 떨지만 난 여전히 비행기를 탄다.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감내할 만큼 여행과 탐험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비행기를 타기에 비해 테니스 코트 나가기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멱살을 잡고 흔들며 ‘너 같은 놈은 테니스 칠 생각도 하지 마!’라고 한다고 해도 죽는 건 아니다. 테니스 대회를 봐도 서로 욕을 하거나, 비아냥 거리는 일은 자주 있지만 주먹을 날리거나 라켓을 사람한테 휘두르는 경우는 없다. 정말 미친 인간을 만나서 한 대 맞을 수도 있겠지만 설마 죽을 때까지 때릴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걱정하고, 또 걱정하고 걱정 할아버지를 데리고 와도 비행기 이, 착륙 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상황이 테니스 코트에서 일어날 것이란 생각은 안 들었다. 

“아이. 씨… 뭐 ’ 죽기야 하겠어?’

하는 혼잣말과 함께 단톡방 모임 참가 신청을 눌렀다.


세상엔 최악이 없다. 최악은 언제나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쓴 소설, ‘자기 앞의 생’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끔찍했던 일들도, 일단 입 밖에 내고 나면 별게 아닌 것이 되는 법이다.’

이 처럼 최악이라 여겨진 상황을 경험하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생각보다 견딜만한 일이 된다. 제 아무리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삶을 돌아보면 최악의 순간이 있다. 모든 걸 망치고, 눈물을 흘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순간을 겪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지금 그 순간을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모든 시련을 잘 이겨냈다는 뜻이다. 그러니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걱정에 사로잡혀 무기력해지지 말자.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다. 우리의 과거가 그 사실을 계속해서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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