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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색달 Apr 19. 2024

웃고, 감사하고, 엘레베이터 문을 열어주자.

처음 나간 코트에서 받은 호의.

해가 쨍쨍한 날 아침. 평소에 잘 쓰지 않던 나이키 캡 모자를 쓰고 집 밖으로 나왔다. 건물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거울 앞에 멈춰 다시 한번 마음들 다잡았다.

‘그래. 죽이기야 하겠어?’

모임은 10시부터였지만 내가 도착한 시간은 9시 30분이었다. 시민체육관 이용 방법을 전혀 몰랐던 나는 일찍 도착해서 혼자 이것저것 알아볼 생각이었다. 주차장으로 진입할 때 봤던 건물 입구로 들어가니 리셉션 데스크가 있었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담당자에게 테니스 코트 이용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혼자는 코트를 이용할 수 없고 최소 2인 이상이 함께 와야 코트를 이용할 수 있다며 일행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았다. 어쩔 수 없이 리셉션 데스크 옆에 비치된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따라 시침도 빨리 달렸는지 금세 10시가 됐고 그 사이 몇몇 사람들이 커다란 테니스 가방을 메고 복도를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혹시. 오늘.. 테린이?…’
 마른 몸에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부사도, 동사도 없이 단어만 나열했지만 그 뜻을 캐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 네… 하하하.’

‘아.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오셔서 신분증 보여주시고 결제하시면 돼요!’

모든 절차를 마치고 테니스 코트 입장 카드를 받았다. 건물 밖으로 내게 말을 건 남자와 함께 테니스 코트로 걷기 시작했다. 코트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걷는 동안 특별한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굳어있는 내 표정이 무서웠는지 애처로워 보였는지 아니면 바보 같아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얼굴은 아니었을 거다.

코트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8명 정도가 참석 신청 한 걸 봤는데 아침에 인원이 더 추가된 것 같았다. 나와 함께 온 남자는 테니스화를 갈아 신고 라켓을 꺼내 스윙을 몇 번 하더니 내게 말했다.

“준비되시면 랠리 좀 하시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아. 네!”

짧은 두 단어 속에 떨림과 비장함을 숨겼다.


가장 안쪽의 코트로 이동해서 몸을 풀었다. 먼저 짧은 랠리로 예열을 한 뒤 긴 랠리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랑 랠리를 한 남자가 그날 모인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잘 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코트의 게임이 끝날 때까지 나와 K는 계속해서 공을 주고받았다. 나는 K가 친 공을 따라가서 스윙하기 바빴고, K는 내가 코트 밖 멀리로 내보낸 공을 뛰어가서 주워오기 바빴다. 정말 열심히 집중하고, 마음속으로 제발 좀 제대로 가라고 빌어도 공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계속해서 코트 안과 밖을 오가는 K에게 다가갔다.

“아. 진짜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못 쳐서 폐만 끼치는 거 같아요. 저는 많이 쳤으니까 다른 분이랑 치세요!”

나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거짓이 하나도 없는 진실 모음집이었다. 나 때문에 제대로운동도 못하는 K에게 진심으로 미안했고,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 역시 진심이었다. 30분 가까이 쉬지 않고 랠리를 해서 지친 것도 사실이었고, 다른 분이랑 치는 동안 나는 쉬면서 구경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K가 대답했다.

“에이! 충분히 잘 치시는데요? 그리고 지금 많이 치셔야 늘어요. 저도 이런 공치는 거 연습한다 생각하고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하시죠.”

나는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내 자리로 돌아와 다시 랠리를 시작했다. 나보다 밝은 표정으로 대답해 준 K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발을 구르고 라켓을 휘둘렀다.


두 시간 동안 랠리뿐만 아니라 내 인생 첫 테니스 복식 경기도 했다. 서브도 넣을지 모르고, 룰도 잘 모르고, 역할도 잘 몰랐지만 나름 즐겁게 게임을 했다. 코트에 나오기 전에 했던 걱정은 빌 게이츠의 과소비를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구력에 비해 너무 잘하시는데요? 구력 속이시는 거 아니에요?”

“좀 만 더 치시면 저희랑 재미없다고 안쳐주실 거 같은데?”

“미안하다는 말 안 하셔도 돼요! 실수 다 하는 거죠 뭐!”

과분한 칭찬과 듣기 좋은 덕담, 넘치는 인심으로 충만한 테니스 코트와의 첫 만남이었다.


닫혀가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헐레벌떡 뒤는 당신을 보고 열림 버튼을 눌러주는 할머니, 줄이 길게 늘어선 화장실 앞에서 엉거주춤 서서 몸을 베베 꼬는 당신에게 차례를 양보하는 청년, 처음 본 테니스 초보와 랠리 같지도 않은 랠리를 하며 잘하고 있다고 응원을 보내는 K. 이들의 호의는 작고 평범해 보이지만 보기보다 훨씬 강력하다. 정의의 검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올바르게 만드는 건 아니지만 따듯한 이해와 연민의 정으로 세상을 따듯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마음에 여유와 감사, 그리고 온기를 불어넣으려면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은 살짝 누를 정도의 힘만 있으면 된다.

호의의 진짜 힘은 전염성에 있다. 느낌적인 느낌이 아니다. 과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친절을 경험한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전달할 가능성이 높다. ‘이타주의의 도미노 효과’ 다. ‘상호 이타주의’라는 어려운 용어로 표현되지만 이는 엘리베이터에서, 화장실 앞에서, 도로와 거리에서, 그리고 테니스 코트에서 매번 일어나고 있다.

나 역시 호의에 전염되었다. 내가 K에게 받았던 호의는 내게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내가 테니스를 치는 동안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기준이다. 덕분에 코트에 처음 나온 테린이 와 함께 하게 되면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지나간다.

‘오! 호의를 베풀 기회다!’

테니스를 가르쳐줄 실력도 안되고, 테니스에 대해 뭔가 조언할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필요한 걸 사줄 돈도 없는 내가 베풀 수 있는 호의는 응원과 칭찬뿐이다. 별 거 아닌 작은 제스처지만 나와 상대방 모두가 풍요로워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코트 이곳저곳에 더 많은 호의를 퍼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웃고, 감사하고,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주자.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는 건 이렇게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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