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권보다는 패배가 낫다.
테니스의 꽃은 무엇일까? 상대의 빈 곳을 정확히 찌르는 다운 더 라인, 깊숙한 곳을 공략하는 크로스 라인,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드롭샷, 그리고 실수를 강력하게 마무리하는 스매시도 모두 중요하지만, 게임을 지배하는 결정적 기술이며 그 자체로 ‘멋’이란 게 폭발하는 서브만큼 멋진 건 없다.
바닥에 공을 몇 번 튕기면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낙하지점을 잠시 쳐다본 후 공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가 이내 하늘 위로 쭉 뻗어 올린다. 공은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고 라켓을 든 손은 동그란 호를 그리며 어깨 위로 올라온다. 중력에 힘을 이기지 못한 공이 공중에 멈춰 복귀를 준비하는 순간 라켓은 등 뒤에서 작은 원을 그리 듯 회전한 뒤 엄청난 속도로 공중에 있는 공을 타격한다. 세련된 Lo-fi 비트의 베이스와 킥소리가 섞인 듯한 타격음과 함께 공은 상대 코트로 빠르게 비행한다. 공은 상대가 움직일 수 조차 없는 T-zone(서비스라인과 센터라인이 만나는 곳. 선이 만나 T자를 만든다.)에 떨어진 뒤 그대로 코트 밖으로 사라진다. 상대의 얼굴엔 허무함이 새겨지고 무력감에 이내 고개를 떨군다.
글을 쓰면서 상상만 했는데도 짜릿해진다. 일기토에서 일 합에 적장의 목을 베어 버리는 관우의 모습처럼 단 한 번의 스윙으로 포인트를 가져오는 강력한 서브는 단연코 테니스에서 가장 멋진 모습이다. 물론 강력함과 정확도를 모두 갖춰야 하는 기술이다 보니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 프로 테니스 경기에서도 서브 에이스가 빈번하게 나오지는 않을 정도니, 아마추어 동호인 테니스 경기에서는 더욱 보기가 어렵다. 아마추어 동호인 테니스 경기에서도 보기 어려우니, 막 코트에 나가기 시작한 시절의 나에게 서브에이스는 사막 한복판에서 wi-fi 신호를 잡는것 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도 부단한 도전과 경험 끝에 이제는 비 오는 날 밤, 강남역에서 집에 가는 택시를 한 번에 잡을 확률 정도는 된다.
날카롭고 정확한 서브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과 실전 경험이 필수다. 아무도 없는 빈 코트에서 홀로 하는 서브 연습이나, 코치님의 지도를 받으며 부담 없이 하는 서브 레슨도 물론 도움이 된다. 하지만 실제 게임에서의 경험이야말로 서브 실력을 끌어올리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서브를 하기 위해 공을 쥐고 베이스 라인에 자리를 잡으면 코트의 모든 사람들이 집중하기 시작하고 라켓을 든 손바닥은 여름날 공원의 분수같이 땀을 뿜어낸다. 연습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부담감은 무거운 추가 되어 어깨를 잡아 끈다. 심장은 마치 성능 좋은 우퍼를 장착한 듯 쿵쿵거리고 덩달아 호흡도 불안정해진다. 연습 때보다 성공률이 낮아지는 건 빈지노가 좋은 앨범을 내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 그래도 익숙해져야 한다. 게임 중에 겁 없이 강력하게, 최대한 무모하고, 자신 있게 서브를 넣어야만 부담감은 낮아지고 성공률은 올라간다. 서브에 실패해도 괜찮다. 우리에겐 세컨드 서브라는 기회가 한 번 남아있다. 그래서 퍼스트 서브는 마음껏 실패할 수 있는 기회다.
물론 처음엔 아주 약하게 쳐도 세컨드 서브를 성공시키기 쉽지 않다. 그렇게 되면 더블 폴트가 되고 상대방에게 점수를 내주기도 한다. 더블 폴트가 서브를 성공시키는 일 보다 더 잦을 수도 있다. 복식경기라면 파트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고, 만약 상대편 플레이어들이 승패와 관계없이 박진감 넘치는 게임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미안함 감정은 두 배가 된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퍼스트 서브조차 안정적으로 넣기 위해 살살 치게 된다. 장담컨대 이는 바보 같은 생각이다.
퍼스트 서브를 그런 식으로 소비하는 순간 두 번째 기회는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다. 훌륭한 서브를 향해 한 걸음 더 전진할 기회 역시 사라져 버린다. 세상 그 누구도 단 번에 완벽한 서브를 구사하지 못한다. 로저 페더러도, 아리나 사발렌카도, 코트 옆에 서 있는 파트너도, 반대 코트에서 걸음을 옮기는 상대 플레이어도 모두 실패와 실패, 폴트와 더블 폴트를 거듭해 온 사람들이다. 실패가 쌓여서 부피가 생기고 그 부피가 그 사람의 실력이 된다. 완벽한 실패가 어설픈 성공보다 훨씬 값비싼 교훈을 들려준다.
나도 다시 실패를 시작했다. 다만 이번엔 테니스 코트 안이 아니라 밖에서의 일이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고, 해보고 싶었던 일을 신나게 실패해 보기로 결심했다. 꽤 오랜 시간 마음속에만 담아 뒀던 일이다. 절대 내 것이 되지 않을 듯했던 플랫 서브와, 킥 서브도 수 천 번 실패한 끝에 결국 상대 코트에 꽂아 넣을 수 있게 된 것처럼, 이 일도 우여곡절과 자잘한 실수, 그리고 달디 단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내 삶에 한 부분이 될 거란 믿음을 갖고 있다. 아마도 서브 에이스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일이겠지만 나에겐 세컨드 서브가 있다. 혹시나 더블 폴트를 하더라도 괜찮다. 점수를 내주고, 게임에 지더라도 기권하는 것보다는 훨씬 값진 경험이 될 테니까.
모두 마찬가지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준비되지 않았고, 충분히 단련되지 않았다 해도, 베이스라인에 서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도전이 된다. 실패하더라도 그 경험을 통해 더 성장하고,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실패는 막다른 골목에 갇히는 게 아니라 조금 먼 길로 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도전할 준비를 하고, 두려움 없이 첫 번째 서브를 하자. 실수를 해도 다음 기회가 있다. 더블 폴트가 무서워 서브를 넣지 않으면 게임은 시작되지 않는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지 않으면 이길 수도, 배울 수도 없다.
순간이 왔다면 있는 힘껏 휘두르자. 실패할 기회와 성공할 기회는 모두 같은 기회에서 시작된다.